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만나며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도 내가 싫지 않은지 개인적으로 연락하곤 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 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해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짐이 없는 거야.”
“혹시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꼴사납게 끝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와 어두워지는 길을 걸으며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는구나!’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며 조용히 걸었다. 뭔가 머릿속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흔들고 그와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진 그가 30여 년 만에 뉴욕을 방문해서 나에게 전화했다.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기억나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
“낮으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서. 하하. 반가워요. 어디예요?”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한때 좋아했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살다가 연락했을까?’ 여름 안개 저편 먼 곳에서 아른거리던 그리운 사람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속삭이는 듯 기분이 들떴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그가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다소곳이 인사했다.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나에게 ‘친구’를 강조했구나.’
나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그와 내가 알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내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높은 톤으로 또박또박 잘 들으라고 지껄여 댔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나는 저절로 맥이 풀리며 조용해졌다.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 추가 멈춘 듯 그와의 시간이 뚝 멈췄다. 그는 나의 수다가 끊긴 분위기에 눌렸던지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싱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일어났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쳐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 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만남과 헤어짐처럼 분홍빛으로 타오르던 노을이 어둠 속으로 차갑게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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