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수아는 침대에 마냥 누워 생각한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낮은 축대가 있다. 그곳에 남학생들이
죽 늘어앉아 미니스커트를 입고 교정을 들어서는 자신의 드러낸 다리통에 와 꽂히는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도 학교를 제칠까? 말까? 고민한다. 학점이 모자랄지 모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연다. 한 캔 남은 맥주를 들이켜자 수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미니스커트에 높은 구두를
찾아 신었다.
“너 작은 키에 그렇게 높은 구두 신으면 더 작아 보여.”
아버지의 잔소리를 무시할 만큼 해장술은 그녀에게 용기를 줬다.
수아가 탄 버스가 삼각지에 멈췄다. 사람들 뒤에 숨은 듯 서 있다가 만원 버스로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가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다. “공연 잘 봤어요. 노래
너무 좋아요.” 하며 가까이 가서 말이라도 붙이고 싶지만, 참는다.
그녀는 버스에서 천천히 내렸다. 뒤에서 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박은 채
걸었다. 그는 갓 빨아 입은 듯한 빛바랜 청바지에 핑크빛 티셔츠를 입고 있다. 배지 색 천 가방이 그의 어깨에 매달려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과향기가 확 날 것 같은 상큼한 모습이다.
수아는 코를 쫑긋거리며 냄새를 수집한다. 왼쪽 교정으로 가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수아는 오른쪽 교정으로 방향을
튼다.
수아는 수업 시간에 붓을 든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늦가을 회색 하늘은 그녀를 더욱더 쓸쓸하게 했다.
“뭐 하는 거야?
멍청히. 작업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학생은
시집 잘 가려고 대학에 들어왔지? 정신 차려.”
등 뒤에서 교수님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수아는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한동안 어슬렁거렸다. 아침에 만난 사과향기 남자와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날이다. 학교 정문
왼쪽으로 그가 잘 가는 다방이 있다. 문을 열었다. 어둡다. 입구에 선 채 어둠에 눈을 익히자 다방 안쪽에 그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의 맞은편에 노라가 앉아 있다.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체 노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질투와 체념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던 수아는 그들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웨이터를 불러 “위스키에 반숙” 큰소리로 주문했다. 작은 위스키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은
그녀의 목젖을 적시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을 달궜다. 그리고 반숙을 꿀꺽 삼켰다.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둘은 전혀 주위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어 수아가 몸을 기울였다. 음악이 눈치 없이 더욱 쾅쾅 울려댄다.
“어! 웬일이야?”
갑자기 키 큰 남자가 반갑게 다가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가득히나 큰 머리통에
앞머리가 이미 벗어지기 시작했다.
“잘 지냈어? 숨어서 인기척 없이
다니는 것이 나를 피해 다니는 것 아니야?”
수아는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만나면 말하려고 했는데 만날 수 없어서 편지 썼어. 집에 가서 읽어 봐.”
수아는 편지를 집어 들지 않았다. 두툼한 편지는 주인을 잃은 채 식탁 중간에 초조한 듯 놓여
있다.
그는 자리에 박힌 듯 앉아 벗겨져 숫도 없는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수아를 느끼한 눈으로 바라본다. 후줄근한 줄무늬 웃옷에 축 처진 나팔바지다. 가까이 가면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다. 수아는 다시 노라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린다.
“밥 먹으러
갈래?”
그가 묻는다.
“배 안 고파. 술이라면 모를까?”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어디로 갈까? 분위기 좋은 곳 아는데.”
“나 높은 구두
신어서 멀리 못가. 가까운 철길 해장국집에서 소주나 한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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