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거두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다 아프지 않고 산들 바람에 실려 가듯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이 들어 어찌케 혀면 욕보지
않고 옹삭하지 않게 니캉 내캉 건강하고 즐겁게 씨잘데 없는 꺽정일랑 말고 심 닿는 데까정 살다 뒈질 때는 거시기 허게 콱 뒈져부러 야 헌다.’는 이야기로 요즈음은 친구들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친정아버지는 평생 몸에 좋은 음식만 드시고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하게 사셨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는 병석에서
‘내가 왜 이렇게 됐니?’
하며 자신이 이렇게 누워 죽음을 맞이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셨다. 아버지의 애절하고 슬픔에 가득 찬 시선을 어찌 잊으랴.
건너 아는 지인은 친정엄마가 자궁암으로 아파 누워
병원을 오가며 죽는 날을 기다리며 고생했다. 보다못해 엄마와 어려운 합의 끝에 곡기를 끊겨 돌아가시게 했다. 둘 다 굉장한 내공을 지닌 분들임이 틀림없다.
친정아버지가 오랜 병석에 누워 힘들어 하는 것을 지켜본
폴란드에서 온 이웃이 있다.
"늙어 아파 누워 가망이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며 좋은 방법이 없겠냐며 나에게 물었다.
‘곡기를 끊는 방법.’이야말로 자살보다는 자식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그럴싸하지 않을까?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위스로 여행 가서 생명 활동을 중지하는 약을 자신의 의지대로 삼키는 방법이 있다. 즉 ‘자살 관광’을 가는 것이다. 스위스는 일찌감치 ‘조력 자살’을 허용했다는 신문기사를 오려놓기는 했다. 글쎄, 막상 나에게 닥치면 아픈 몸을 끌고 스위스까지 갈 수 있을지.
벌어질 앞날 일들이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냥 자신 없이 더 늙어 아프면 ‘곡기를 끊어 봐.’
아니면 ‘자살 관광’을 주절거려본다.
내 글을 애독한다는 어느 독자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우울증이 있는 것이 아니냐?”
‘우울증을 왜? 앓는 거야?’
할 정도로 나는 전혀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남편은 나보고 우울증은커녕
쾌활 과다증이라며 교양있게 행동 좀 하랄 정도니 말이다.
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우울감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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