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잔 것인지, 자지 않고 눈만 감았다가 뜬 것이지 알 수 없는 몽롱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후배가 술 마시고
나이 든 분에게 실수했다. 다음 날, 사과 한 상자를 들고 찾아가서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일을 생각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토플을 보고 유학은 왔지만, 전공을 바로 시작하기에는
부족해 전공과 영어 수업을 병행하던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가려는데 동양 남자가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나이가 나보다 꽤
많은 듯한 점잖은 분이다. 한국 남자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거니와 함께 수업 듣는 사이라 달라는 전화번호를
줬다.
영어수업만 듣는다며 이어지는 그의 사연은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퀸즈에서 장사하다가 건물도 사고 자리 잡느라 결혼이 늦어졌다고 했다.
브루클린에 있는 피터루거 스테이크 하우스, 쉽세이드 베이 바닷가 식당, 맨해튼 5 애브뉴 고급 식당
등 비싸고 좋은 곳으로 안내하며 나에게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데이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그분에게 전화했다. 외국인 여자가 받는 게 아닌가! 순간 ‘이게 뭐지!’ 하는 느낌으로 멈칫했다.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라는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혹시 신분문제 해결로 외국인과 결혼하고 향수를 달래려고 한국 여자를 찾는 경우가 아닐까? 미국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없어 만나기가 두려웠다. 대학동창 모임에 간다는데 함께 가자는 말도 없고 점점 의심이
들어 슬슬 피했다.
어느 날, 학교 근처 스텐드 바에 앉아 이야기하다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몇 번을 만났다고, 상대방에 대해 뭘 안다고 결혼을?
사람은 점잖고 잘해주는데 결혼하기에는 삼촌 같은 느낌이 든다. 더 사귀기도 두렵고 비싼 식당에서 얻어먹을 수만도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죄송합니다. 실은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쥐어짜둣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몹시 실망하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난처했다. 그 날 이후 다시는 그를 만나적이 없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유부남과의 만남이다. ‘어느 남자가 나 유부남이요.’ 하고 떠들겠느냐마는 백그라운드가 짙은 안개에 잠긴 듯 불투명한
남자는 유부남일 확률이 높다. 유부남을 만난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쳐서 내 것으로 하겠다는 도둑심보다.
또한, 여러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결혼 상대로 대했을지도 모른다. 친정아버지의 바람으로 상처 받은 나의 과잉 반응으로 그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혹시 제가 오해했다면 사과가 곁들인 그림과 지면으로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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