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이태원에 살았다. 그래서일까? 집안에는 미제 물건이 많았다. 메가네(안경) 라고 불리는 아줌마가 오던 목요일은 먹을 것이 쏟아지는 날이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그녀는 긴 통치마를 입고 엉기적거리며 문을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마술을 부리듯 치마 속에서 별의별 미제 물건을 쏟아냈다. 깡통 음식, 화장지, 치즈, 오렌지... 문지방을 넘어 올 땐 뒤뚱뒤뚱 오리 모습으로, 나갈 때는 제비처럼 날아갈 듯 사라졌다.
메가네 아줌마는 아버지가 주문하면 아이스크림만 빼고는 다 가져왔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스팸(spam)이었다.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먹으면 꿀맛이었다.
그 시절 엄마가 공부하라고 눈치 줄 때마다 책 보는 척하며 보던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시어스 카탈로그 (Sears catalog)였다. 사진으로 도배한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카탈로그 속 미제 물건들은 영어를 몰라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동화책처럼 끼고 보다가 베고 잠들곤 했다.
메가네 아줌마는 주로 식품류를 가져오지만, 퉁퉁하고 느글느글하게 생긴 부로커 아저씨도 있었다. 아버지가 가전 제품을 주문하면 잽싸게 미8군에서 구해왔다. 우리 집 벽장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들이 많았다. 내 결혼 혼수품으로 엄마가 하나씩 모아놓았던 것이다. 내가 결혼도 못 하고 미국 온 후 그것들은 누가 어떻게 말아 먹었는지 궁금하다. 여동생도 일 년 후에 나를 따라왔는데.
뉴욕에 와서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노부부와 같은 건물에 살았다. 그들은 일차대전 후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29세에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왔다. 자식도 없고 거동이 불편했던 노부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에 살았기 때문에 외출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우유를 사 들고 올라가곤 했다. 엠파이어 빌딩이 보이는 창가에 놓인 빨강과 흰색 체크무늬 낡은 식탁보 위에는 마시던 커피와 버터를 바른 토스트가 놓여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깡통 음식으로 때우는 듯 오븐은 항상 깨끗했다. 양로원에 가지 않고 그 아파트에서 95세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셨다.
코로나-19로 마켓 드나들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나도 깡통 음식을 종종 먹는다. 음식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맛없는 깡통은 밀가루와 달걀을 넣고 부침개를 해 먹으면 먹을만하다. 남들은 잘 먹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일단 간편해서 좋고, 요즘 내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다.
어릴 적 이태원 동네 길가에서 후까시한 머리와 분홍 립스틱을 바르고 화려한 폴리에스터 옷을 걸친 미국 할머니들을 자주 봤다. 빈약한 몸에 무거운 옷, 목걸이, 반지 그리고 명품 가죽백 걸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가벼운 폴리에스터 옷에 천 가방을 둘러메고 깡통 음식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흐르니 나도 이렇듯 싸구려 미국 할머니가 돼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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