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래 살긴 살았나 보다. 10년 20년 30년 하며 카운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더는 세지 않고 살고 있다. 그냥 이곳에 이대로
살다 이곳에서 잠들겠지?
나에겐 고향이랄 만한 곳이 딱히 없다. 미국 오기 전 가장 오래 산 곳이 이태원이다. 그전엔 서울시 중구 남산동, 한국에서 내가 살던 곳은 이 두 곳뿐인 것에 비해 뉴욕에서는 롱
아일랜드 가든시티, 퀸스 엘머스트, 맨해튼 그랜드 스트릿 그리고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다시 맨해튼으로. 부모 떨어져 살다 보니 비빌 언덕이 없어 여기저기로 짐 싸들고 옮겨 다녔다.
어릴 적 남산동 하고도 숭의여고 밑에 살았다. ‘교장 선생님 지나가신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조그마하고 단정한 분이 아침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실 때마다 엄마는 일어나라고 깨우곤 했다. 철학자 칸트가 동네 어귀를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시곗바늘을 맞췄다는 식이라고나 할까?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시고 나면 밥 동냥하는 형제가
‘밥 좀 주소.’ 외쳤다.
엄마는 하얀 밥을 때에 찌든 시커먼 철밥통에 넣어주곤 했다. 자다 일어나 문틈으로
내다보는 내 눈엔 그들의 배고픔은 모른 채 밥의 흰색과 철밥통의 검은 색의 대비로만 기억한다.
남산초등학교 내 짝은 우리 집 위에 있던 고아원에서
온 아이였다. 모두 그 아이와 짝이 되기를 몹시 싫어했지만 난 싫다는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짝이 되었다. 그 아이의 훌쩍거리는 콧물 소리는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시험 볼 때 집중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를 힘들게 했다. ‘고아원 짝의 콧물 소리’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는 것이 뭔가 복잡하고 치사한 ‘내가 내치면 그 아이는 설 곳이 없다.’는 생각에 꾹 참고 그저 학년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당시 그 아이와 거리를 두고 앉으려고
애쓰던 기억이 지금도 남편이 코를 훌쩍이면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휴지를 내밀며 질색한다.
방과 후에는 언니와 함께 널어 놓은 빨래를 지키며
마당에서 놀았다. 툭하면 걸인들이 빨래를 걷어가기 때문이다. ‘엄마, 빨래~’ 하고 소리 지르면 벌써 저 멀리 허기져
헐레벌떡 뛰어가던 그들의 남루한 모습에 엄마는 ‘됐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빨래를 지키며 놀던 어느 날, 젊은 청년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엄마가 맨발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죽은 아들의 친구가 들어오는 것을 아들이 살아 돌아온
줄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물을 글썽이며 아들의 친구를 반기던 한 많은 우리 엄마.
전쟁이 끝나고 시골집에서 아들(오빠) 둘이 파묻힌 지뢰를 꺼내 가지고
놀다가 지뢰가 터져 함께 죽었다. 자고 일어나니 죽어있는 멀쩡했던 딸(언니), 엄마와 아버지는 우리에게 전혀 내색은 하지 않고 묻고 살았던 일로, 위로 오빠 둘과 언니를 잃고 난 뒤 태어난 나는 엄마의 한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마는 한으로
병을 얻고 한으로 살다 한 많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작가 박완서의 말마따나 ‘더러운 세월’을 헤쳐온 세대,
그런 집이 어디 우리 집뿐이겠는가!
우리 대부분이 아픈기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인자하심에 걸인들이 저 집에 가면 밥도 얻어먹을 수 있고 옷도 얻을 수 있다며 고마와 했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ReplyDelete저 역시 이젠 미국에 산 년수가 더 많아 이곳이 고향이 되어버렸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