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머리는 반백에 배가 약간 나왔다. 나는 작고 마른 것이 요즘 잘 걷어 먹고 자란 초등학생 몸매 랄까? 후덥지근한
날씨를 핑계로 나이답지 않게 소매 없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 게다가 빨간 테 선글라스에 챙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래서였을까?
더위와 사람에 지쳐, 강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해 쪽으로 제일 먼저 떠나는 버스가 강릉이라는
말에 두말않고 올라탔다. 귀가 먹먹하더니 안개 쌓인 산길 사이로 잘 뚫어 놓은 터널을 지나갔다. 문득, 예전에 산을 굽이굽이 돌아
만들어 놓은 길을 지금도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강릉에 내려 경포대 가는 택시를 탔다.
"관광객들이 현지 주민의 바람과는 달리 터널이 잘 뚫리자 당일치기로 왔다
가기 때문에 숙박 영업경기가 좋지 않아요."
운전사의 넋두리를 들으며 데려다 준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호텔에서 소개해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식당 입구 커다란 어항 속,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건지 헤엄치는 건지 모를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갇혀 있다. 자세히 보니 비늘이 벗겨지고 지느러미가 거덜거덜한 모양새가 차라리 ‘죽여주쇼.’ 하는 표정이다. 식욕이 사라졌다.
갑자기 쌍까풀을 심하게 한 아줌마가 호텔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반기며 튀어나왔다.
메뉴를 보는 남편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입맛을 다시며 소주를 주문해야 하는 시점인데 말없이 메뉴판만 보고 있다.
“왜 그래, 먹을 게 없어요.”
나에게 슬그머니
건네준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메뉴판 가격에 동그라미가 너무 많다. 15만 원, 25만 원 비싼 것은 35만 원이었다. 한 접시에 100~300불이라니!
식당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다. 별 볼 일
없이 생긴 식당 주제에.
쌍까풀 아줌마가 잘해 들릴 테니 주문하라고 재촉했다.
“죄송한데요. 왜 이리 동그라미가
많아요? “
물었다. 남편은 얼굴을 식탁에 파묻고 아무 말이 없다.
“동그라미가 많다니요?”
“죄송한데요. 우린
돈이 없어서 안 되겠는데요."
일어서려는 나에게 잘해 주겠다며 붙잡았다. 뿌리치고 나오는 내 뒤를 남편이 안절부절 따라 나오며
“혹시 우리를 불륜으로 보고 불륜메뉴를 보여 준 것 아니야?”
“설마?”
"불륜들은 저 메뉴판 보고 상대방 체면 때문에 차마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얄팍한 상술 아닐까?"
흐느적거리는 대낮엔 길거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가, 저녁 무렵엔 불야성처럼 가게 문이 열리고 길거리엔 사람이 넘쳐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다음 날 아침에 찻집을 찾지 않았을 텐데. 모닝커피 마실 찻집을 찾으며 경포대 바닷가를 걸었다. 문 연 카페가 없다. 바닷가 후미진 곳, 파운데이션을 바삐 발라 허옇게 뜬 얼굴에 진분홍 립스틱을 짙게 바른 아줌마가 손수레에서 커피를
팔고 있다.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커피를 타 주면서 힐긋힐긋 우리를 쳐다봤다.
‘밤새 여행객들이 다 떠난 빈 아침 바닷가, 반백이 된 남자와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거닌다는
것은 그렇고 그런 사이다.’라는 표정인가? 아니면 어젯밤 불륜메뉴에 놀라 지레짐작으로 오해하는 건 아닌지? 불륜 기분을 내며 아침 바닷가에서
마시는 1,000원짜리 커피 맛이 나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