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구두 닦지 안씀메?”
조용한 뒤뜰 야자수 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시할머니가 못마땅하다고 힐난하셨다. 차를 타고 외출하려고 부산떨고 있었다.
“이 봅세, 차 닦지 않고 뭐함메? 서울 간나들은 게을러서리.”
LA 시댁에 결혼 준비하러 가서 정신없이
바쁜 손자며느리가 될 나에게도 이 정도였으니. 시어머니에게는 오죽하셨을까?
김일성이 죽은 해가 1994년이다. 김일성만 죽으면 통일되는 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입에서 맴돌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시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시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난 시어머니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시어머니는 외출했다가도 해가 까물까물 어슴푸레 지면 돌아가신 시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는 듯 집에 가야 한다며 성화시다. 해지기 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시할머니에게 평생 혼이 났기 때문이다. 저승에서 시집살이시키려고 시할머니가 ‘어마이, 어마이,’하고 부르시는지 끄떡하면 저세상으로 빨리 가겠다고 보채신다.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와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에 사셨다. 남산 꼭대기에 미군 쌕쌕이를 잡는다고 설치한 인민군 대공 포대를 미군
전투기가 고공에서 폭격해댔다. 서울이 점령당한 그해 여름, 온통 주변이
아비규환이었다. 시어머니는 바로 집 앞에서 폭격 맞아 푸득 푸득 튀며 피를 내뿜는 절단된 몸으로 물 달라고
울부짖으며 죽어가던 이웃을 목격하셨다. 물 길으러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민간복을 좀 달라고 울며불며 통사정하는 사이 인민군 따발총에 눈앞에서 쓰러져간 패잔병 국군 모습이 평생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두려움에 옆집으로 위안 삼아 마실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집은 직격탄을 맞았다. 돌아와 가재도구를 수습하는 동안 시할머니가 천정에 감춰두었던 남북한
종이돈은 완전히 부스러기가 되었다. 그것을 대바구니에 담아놓고 몇 장은 풀에 붙여 쓰다 지쳐서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다 버렸단다. 그런 처절한 기억들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머리 하얀 시어머니의 뇌리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
시할머니 장례식에서 가장 서럽게 흐느끼며 우시던 시어머니 뒷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희로애락 대부분이
시할머니의 잔소리를 통해서 느껴서였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도 만나지 않고 거의 혼족(혼자서 즐기는 인간)으로 지내는 나의 걱정도 아닌 걱정거리는
과연 무엇일까? 창밖을 멍청히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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