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3, 2012

집으로

서울 종로거리엔 많은 사람의 물결로 넘쳐난다. 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피해 사뿐히 움직여 파도타기를 잘해야만 빈 틈새를 비집고 몸을 넣을 수 있다. 정신을 놓으면 사람들에 휩쓸려 나도 모르는 어딘가로 이끌려 가 내동댕이쳐질지도 모른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에 인파 속을 헤치며 종로거리를 걸었다. 어느덧 바삐 걷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나 또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정류장에 서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 번호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이태원 가는 버스번호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어렵사리 공중전화를 찾아 집에 전화했다. 전화번호 자리를 누르고 나니 그 뒷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초조함이 서서히 밀려왔다. 인적이 끈긴 어두운 밤, 과연 나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었던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다 잠에서 깨어났다.

어릴 적 우리 집 부엌 옆에 코딱지만 한 어두침침한 방이 있었다. 그곳엔 쓰지 않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어 가끔 몰래 숨어들어 가 없어진 물건을 찾거나 책을 읽 잠들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 
엄마는 저녁상을 차리며 잠든 나를 깨우곤 했다. 내가 그곳에 있는걸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커다란 주황색 호박 단추가 달린 노란 비단 마고자를 입은 할아버지는 곰방대를 물고 계시다 
진지 드세요.” 
하면 큰 헛기침을 그 긴 곰방대를 놋쇠 재떨이에 탕탕 털었다낭랑한 쇳소에 식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식탁 주변으로 모였다. 김과 조기 그리고 맑은 뭇국이 놓인 밥상이 할아버지 앞에 놓이고 할아버지가 수저로 국을 뜨면 그제야 약속이나 하듯 식구들도 수저를 들었다.

저녁때가 되면 나를 찾는 엄마가 있는 뭇국 냄새가 가득한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꿈이라니!

언젠가, 뉴욕에서 10여 년간 산 한 후배가 한국으로 떠나며 
그동안 꿈속에 뉴욕 장면이 등장한 적이 없다.”
던진 한마디가 생각난다. 뉴욕에서 산 세월이 서울에서 산 세월보다 더 긴데 나는 아직도 꿈속에서 서울집을 찾아 헤매니꿈속에서 난 결혼하지 않은 외로운 싱글이거나 엄마를 아 헤매는 16세 정도의 모습이고 남편은 동네 아저씨 아니면 어디서 많이 본 나그네. 우리 아이들은 이웃 아이들로 아니면 사촌 형제 등으로 등장한다. 어릴 적 나의 기억은 언제까지 어른이 된 후의 기억이 들어 올 틈을 주지 않고 머릿속의 주인 행세를 할는지!

멀리 떠가는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작아진다. ‘서울 가는 비행기가 아닐까?’ 왜 비행기만 보면 한국 가는 비행기라는 생각이 드는지! 저 비행기를 타면 저녁상을 차리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 지 25년이나 지난 엄마를 만나러

Friday, June 22, 2012

To home

Jongno Street in Seoul is overflowing with waves of people. Only when I am good at surfacing can I squeeze in an empty niche. If I let go, I might be swept away by people and thrown away somewhere I don't know.

On a sultry summer night, I walked through Jongno Street, trying to get somewhere. Before I knew it, it was time for the busy walkers to disappear one by one. I also had to go home. I stood at the bus stop and waited for the bus home. But what a surprise! I suddenly couldn't think of the bus number to go home.

I asked people for the bus number to Itaewon, but no one knew it.  I called home on a hard-found public phone. I couldn't think of the back number after I dialed four digits. The nervousness of not being able to go back home was creeping in. Indeed do I have a home to go back? I woke up in a panic of fear.

When I was young, there was a dim room next to kitchen. There were a lot of unused things piled up there. I sometimes sneaked into the room to find missing items or read books.

"Tell grandpa to have dinner." my mother would wake me up from sleep, setting the table. How did she know I was there so well?

The grandfather, dressed in a yellow silk jacket with a large orange amber button, was holding a long smoking pipe. I said, "have a dinner," and he gave a big cough and beat the long smoking pipe to a brass ashtray.

With the loud sound of iron the family stopped their work and gathered around the table. The table set up with seaweed and fishes, and fresh radish soup. When my grandfather spooned the soup with spoon, the family also picked up the spoon as promised.

In the evening, I thought I were going to a house full of the smell of soup with my mother looking for me, but a dream!

I know a junior who lived in New York for more than a decade left for Korea. He used to say, "I have not had dreams the New York scene appearing." I'm just like him. My life in New York is longer than my life in Seoul, but I still searching for my Seoul home in my dreams.

In my dreams, I am a lonely single who is not married, or a 16-year-old girl wandering around looking for my mother. My husband is a man whom I've seen a lot. My children appear as neighbors or cousins. How long will my childhood memories act like masters without giving me a chance to remember when I became an adult?

The plane disappeared into the clouds appear and grow smaller ‘Isn’t it a flight to Seoul?’ Why do I think it’s a plane to Korea? I think that plane will take me to my mom's place for dinner. To meet my mother, who has been dead 25 years ago?

Saturday, June 9, 2012

이태원에서 온 여자

그래, 나 이태원에서 온 여자다. 그래서 어째 다는 거야.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와 혀끝에서 뚝 떨어지려는 것을 꾹 누루고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래전, 브루클린한 야채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게 주인아저씨 왈 
한국사람이에요? 이 동네 살아요? 미국에 언제 왔어요? 
대꾸하기 싫지만, 한국사람끼리니까 순수히 대답했다
이태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계속 묻던 아저씨의 신상 조사가 갑자기 멈췄다. 이태원에서 왔으면 뻔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야채 가게 아저씨와 알고 지내는 동네 한 아주머니가 굳이 초대도 하지 않은 우리 집에 불쑥 찾아왔다. 물증을 잡으려는 예리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봤다
결혼사진없네. 결혼식은 했어? 
의심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신상 조사를 한 아저씨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호구조사를 나온 사람 마냥.

나는 남산동에서 태어나 남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태원으로 이사 왔다. 미국 오기 전까지 이태원에 살며 길에 지나다니는 외국인을 자주 봤다. 당연히 미국에 와서도 다른 한인 이민객과는 달리 외국인에 대한 시각적 저항감이 별로 없었다이태원 중심가에 있는 웨스턴하우스라는 서양 식당을 어릴 적부터 아버지 따라 드나들었다. 서양 음식과 문화에 대한 접촉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이태원(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이 지역에 배나무밭이 많다는 이유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은 또한 임진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 그 여성들이 낳은 혼혈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리기도 했단다임오군란 때에는 청나라 부대의 주둔지였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전용 거주지였다. 한국전쟁 이후엔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기지촌 성격을 게 됐다고 한다. 

이태원 산기슭에 울창한 나무에 둘러인 음침한 사당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외군에게 치욕을 당한 여성들의 한 많은 사연을 품은 듯 근처만 가도 한여름에 등 줄기가 써늘해지곤 했다.

외국 어디에 나갔다가 온 적이 있느냐질문에 외국은커녕 이태원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이태원은 한국 속의 외국이다.

그런 험난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태원에서 온 나는 신원조사를 할 것 같은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피해 다녔다. 아니면 가게 밖에서 한인 업주나 케셔가 있나 없나 슬쩍 안을 들여다보곤 발길을 돌려야 했던 편치않은 시절이 있었다그러나 요즈음은 미주 한인 삶의 연륜이 쌓여 외국인 점원을 쓰기도 하고 1.5세 자식들이 물려받아 운영하는 가게가 많아졌다. 이 가게 저 가게를 마음 놓고 들락거려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이태원에서 온 여자는 한결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한 걸까

Friday, June 8, 2012

A woman who came from Itaewon

"Yes, I am a woman from Itaewon. So what?" The sound came up to my throat and swallow what's about to fall from the tip of the tongue and I popped out like a shot

A long time ago, it happened at a grocery store in Brooklyn. The owner of the grocery asked, "Are you Korean? Do you live in this town? When did you come to the United States?" I hate to answer, but since I'm Korean, I answered purely. "Where have you lived in Korea?" "Itaewon..."

Even before my answer was finished, he looked up and down me with eagle's sharp eyes, and the investigation of his, who kept asking, suddenly stopped. He was a look 'If I came from Itaewon, it was obvious.' 

A woman in the neighborhood who knows the grocery owner came to my home, which she hadn't even invited. She looked around my home with keen eyes to catch the evidence. “There are no wedding photos. Did you have a wedding? ” Like someone who came out  to prove what the grocery owner did.

I was born in Namsan Dong and moved to Itaewon after graduating from Namsan Elementary School. Before coming to America, I often saw foreigners living in Itaewon and walking on the street. Naturally, there was little visual resistance to foreigners, unlike other Korean immigrants, even when they came to the U.S.

From when I was young, I used to visit a western restaurant called Western House in downtown Itaewon, where I could naturally contact Western food and culture.

The name Itaewon came from the reason that there were many pear tree fields in this a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also called Itaewon, because where women who were rap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mixed-race people born to them lived. During the Imo Incident period, it was a camp of the Qing Dynasty and a residence and when exclusively for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fter the Korean War, the U.S. military base came in and became a base village.

At the foot of the mountain in Itaewon was a gloomy shrine surrounded by dense trees. As if to carry many women's resentment humiliated by foreign soldiers in several wars, the stalk of the backs became cool in the middle of summer even if it was nearby the shrine.

When asked where had been to, Itaewon is a foreign country in Korea, as there are jokes that "I have never been to Itaewon, let alone abroad."

I who came from Itaewon, where had such a difficult story, I avoided a store run by a Korean who seems to be doing an identity check. Or there was an uncomfortable time when I had to look inside to find out whether there was a Korean owner or a cashier. 

These days, however, as the Korean-American life has been built up, foreign clerk has run many shops. I've been going in and out of the store, but nobody cares about me and not asks me.

The woman from Itaewon was much more free. But why is it so empty?

Saturday, June 2, 2012

워째 그려?

어둠 속에서 불도 켜지 않고 마냥 앉아 있었다. 아이 둘 다 떠난 집,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강아지라도 키울 걸 그랬나. 저녁때가 되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돌아오던 아이들을 위해 조급해진 마음으로 부엌에 들어가곤 했는데.

밥하기 싫어도 해야겠지! 랩탑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유튜브에서 젊은 시절 남편이 좋아했던 음악을 틀어 놓고 촛불을 켰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상을 차렸다. 남편은 기분이 좋은지 말이 많아졌다.

음악을 들으며 저녁을 먹는 것도 며칠, 조용해진 남편이 노래 볼륨을 낮추란다. 드디어는 음악을 끄라며 먼저 상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나가는 남편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며
과연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함께 살고 있을까?’

저녁을 일찌감치 끝내고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집어 들었다. 충청도 대천을 무대로 한, 읽으면 읽을수록 감질나는 충청도 사투리에 빠졌다.

친구들 덕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에는 익숙했지만, 충청도 사투리는 생각이 안 나유~’  하고 늘어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충청도 사투리와는 다르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한 충청도 사투리로 써 내려간 책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문장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밥상에 앉아 오만 인상을 쓰고 있는 남편에게 
"왜 짜증이야? 또 왜 그러는데."
째지는 서울말로 한마디 하려다 
근디, 워째 그려? 승깔 나는 일 있는 가벼. 뭐가 문제?” 
물었다
"거시기 사는 게 찮혀서리.” 
책을 함께 본 남편도 사투리로 대꾸했.
암 그맴 이해하제.” 
둘은 서로 쳐다보며 깔깔 웃.
쌀쌀맞은 서울말로 물으면 대답하기 싫어 저만치 가버렸던 남편이었다. 관촌수필을 읽고 난 후론 사투리로 투정하면 
마누라 되게 웃겨이. 그려, 그려 괜찬혀 질겨.” 
웃으며 받아넘긴다.

열심히 충청도 사투리를 쓰다 도가 지나칠 때는 전라도 사투리까지 썩어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충청도, 전라도를 넘나들며 남편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다언제까지 남편 비위를 맞추며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 그냥 엎어버리려다 가도 
그려, 비위 맞추며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 까졍 살껴.”

멀리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어이 아덜, 어뗘, 괜찮은 겨? 살만 혀?” 
잠시 말이 없던 아이가 
엄마 입 아파요?”  

Friday, June 1, 2012

What's wrong?

I sat without lit a light in the dark. Both children have left the house. There is only desolateness. In the evening, I would grab my hungry stomach and go into the kitchen impatiently for the children who were coming back.

Even if I don't want to cook, I have to! I went to the kitchen with my laptop. On YouTube, I played my husband's favorite music and lit a candle. Dinner was set with wine. My husband is in a good mood and talks a lot.

It was only a few days to eat dinner while listening to music. My husband, who became no words, asked me to lower the song volume. Finally, he turned off the music. Looking at his bent back leaving the kitchen, I thought that 'would I still live together if there were no children?'

After finishing the dinner early, I picked up ‘Lee Mun-gu’s Gwanchon essay.’ The story is based in Daecheon, Chungcheong-do. The more I read, the more I fell into Chungcheong-do dialect.

Thanks to my friends, I was familiar with the dialect of Gyeongsang-do and Jeolla-do, but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differently from the Chungcheong-do dialect I thought. I had to read and re-read the sentence because I didn't know what the contents of the book written in severe Chungcheong-do dialect mean.

"What matter with you?" I asked to my husband, who was sitting at the table and making an bad impression. I was going to say a word in cold Seoul dialect, but "What's wrong? What's the problem?" I asked him with the dialect of Chungcheong-do. "It's hard to live." "I understand your feeling." My husband, who read the book together, also replied with a dialect. We two looked at each other and grinned.

He was a husband who had gone away because he didn't want to answer it if I asked in a chilly Seoul dialect. After reading the Gwanchon Essay, he would say, "Wife, you are hilarious. Yes, It is going to be okay."

I talked in Chungcheong-do dialect too hard, and then I go too far and mix up Jeolla-do dialect. I am busy trying to please my husband by crossing Chungcheong-do and Jeolla-do dozens of times a day. How long do I have to live like this way? In spite of thought about ending my marriage, Yeah, I will live up to the black hair falls out with him.

A call came to my son who had gone far. "Hey, you okay? "Easy as pie?" I said with the dialect of Chungcheong-do. "Mom, your mouth hu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