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30, 2010

돌아가자! 브루클린으로

"뉴욕을 떠나고 싶어!
뉴욕에서 산전수전 겪었는데도 여전히 불투명한 생활에 지친 남편의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이다. 


몇몇 동료가 벌써 몇 년 전부터 이어지는 고국의 호황에 발맞춰 잽싸게 돌아가 교수님이 되었다는데 열을 받았나아니면 뉴욕을 사랑하는 나를 만나 꼼짝달싹 못 하고 사는 게 싫은가? 남편은 
선언했다.
한국에 돌아가 대학 자리를 알아보겠어.
"나 빚을 내서라도 짙푸른 수목이 우거진 호수가 있고 사슴이 뛰노는 북부 뉴저지로 갈레."
우리는 동의했다. 때문에 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소리를 평생 듣고 사느니한번 해보시지.하는 투였다. 하고 싶은 것은 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활 철학인지라.

1995 1, 결혼 10년 만에 우리 부부는 각자 원하는 삶을 찾아 당분간 떨어지기로 했다. 남편은 서울로, 나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뉴저지로.

뉴저지로 이사 가면서 인스펙션도 통과하지 못한 낡은 차를 미련없이 폐차시키고 아담한 차도 한 대 뽑았다. 클래식 음악의 볼륨을 한껏 올리고 생머리를 휘날리며 노스버겐 앤더슨 애비뉴를 멋지게 달렸다. 기분이 째졌다.

군이 그리도 좋다는 초등학교로 아이들을 전학시키고, 방과 활동으로 축구팀에도 넣었다. 현란한 유니폼을 입고 푸른 들판을 달리는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백인들 틈에 끼어 그들과 목소리로 응원하고 있는 나 자신이 드디어 미국생활을 즐기고 있었.

도서관의 커다란 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너무도 한가해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렸다. 뒤뜰에 불현듯 떼 지어 나타난 사슴 무리 속의 새끼 사슴이 어찌나 귀엽고 신기하던지 눈에 눈물이 고였주말마다 쇼핑몰에 가서 끝없이 쌓인 물건들 틈을 헤집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도 신이  생전 보지도 못한 장난감을 보며 새로운 환경을 즐겼
여기저기 이력서를 낸다며 만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자주 하는지 틈틈이 전화로 주고받는 남편의 목소리도 아주 신이 났.


긋불긋한 낙엽 지는 그해 가을, 창가에 앉아 뒤뜰을 보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연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닌 듯.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공허함이 절절했다. 붉은 노을 뒤에 어둠이 내리깔리면 도시생활과는 달리 마치 절해고도의 갇 적막감이 엄습했다.
"엄마, 그래? (브루클린) 가자. 아빠 안 와?” 
다민족과 어울리다 아이들이 백인과 동양인만 있는 학교생활에 적응이 안 되는지 툭하면 집에 가자고 칭얼거렸다. 
이곳이 너희 집이야.” 
아빠, 들을게 빨리 돌아와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주며 보내 달랬다.

강사 생활하며 전임 자리를 기웃거리며 1 가까이 서울에서 어기적거리더니 주변인들과의 진지한 만남도 식었는지 남편도 점점 외톨박이가 되어갔다. 처음 때와는 달리 축 처진 목소리로 미국 소식을 자주 물었본다.
"아무래도 미국에 너무 오래 살았나 봐. 한국 생활이 쉽지가 않네. 돌아가야 할까 봐." 
"그래, 나도 뒤뜰에 나온 사슴 몇 번 보고 나니 별로야. 아이들 움직일 때마다 운전해 주느라 피곤만 하고 그림도 못 그렸어. 그냥 브루클린으로 돌아가자.”

편은 한 해 동안 모국에 대해 한풀이를 하고 돌아왔다. 더는 이 범선의 단편오발탄에서 실향민인 등장인물이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내뱉듯 ‘(돌아) 가자! (돌아) 가자!’는 중얼거림이 남편 입에서 사라졌다. 그림 같은 전원생활에 대한 꿈이 무의식 속에서 녹아내리듯 말이다. 


잘 지내다가도  도질 때가 있다
"얘들아 엄마 아빠가 멋진 썸머 하우스 보고 왔는데 보러 가지 않을래?” 
"좋으면 엄마 아빠만 가서 사세요. 우리는 그냥 브루클린에서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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