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하는 작가와 내 글을 읽는 독자는 친구 사이란다.
“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그림을 그리니 얼마나 행복하니. 봐라 이 글을 쓴 이수임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고생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프닝에 오면 이수임을 만날 수 있어.”
해서 왔단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독자는 나를 보자마자 글을 잘 읽고 있다며
“스튜디오 마련하느라 고생을…”
난 속으로 ‘스튜디오? 갑자기 웬 스튜디오’ 하며 너무 오래전 일이라 빨리 머리 회전이 안 되
“네, 네…”
만 했다.
그분은 다시
그분은 다시
“고생이 많으시지요?”
친정 언니 같은 자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는 고생 많이 하셨지요? 과거형이 아닌가?.
“글 마당에는 옛날 일을 쓴 거예요. 지금은 잘 사는데....”
화가 남편과 사느라 고생을 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좋아졌다. 글쎄 얼마나 잘 사는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의사를 남편으로 둔 시누이보다 낫다. 물론 잘 벌지 못하는 의사지만. 시어머니 말씀이
화가 남편과 사느라 고생을 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좋아졌다. 글쎄 얼마나 잘 사는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의사를 남편으로 둔 시누이보다 낫다. 물론 잘 벌지 못하는 의사지만. 시어머니 말씀이
“살다 보니 화가인 우리 아들이 의사인 사위보다 더 잘 산다”
며 좋아하실 정도다.
부자가 망하면 3년이 간다는데 가난한 사람이 잘살게 되어 마음의 여유를 갖는 데는 30년은 더 걸리는 것 같다. 그러니 그 독자분이 말했던
부자가 망하면 3년이 간다는데 가난한 사람이 잘살게 되어 마음의 여유를 갖는 데는 30년은 더 걸리는 것 같다. 그러니 그 독자분이 말했던
“고생이 많으시지요.”
현재 진행형이 맞는 말이다. 경제적으로는 좋아졌지만, 아직도 고생할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확 써 버리려다가도 옛 생각이 나면 머뭇거리며 소심해지기 때문이다.
오래전 힘들게 살 때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손님은 다음날 코니아일랜드에 가자고 했다. 크레딧 카드는 물론 없다. 은행에 잔액이 겨우 10달러 정도였다. 이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그 10불을 이리 쪼개보고 저리 쪼개 봐도 대접할 빵과 달걀 그리고 우유를 사고 나면 코니아일랜드를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터질 것 같은 머리로 그 10달러를 찾으러 은행에 갔다가 차에 키를 놓고 차 문을 잠갔다. 여분의 키를 가지러 먼 길을 걸어 집에 왔다. 손님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키를 찾아 다시 은행까지 걸어갔던 시절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잘산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은 나를 철들게 했지만, 아직도 물귀신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훈훈하다. 가난했기에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을 읽고 위로해주는 독자를 만날 수 있어서.
오래전 힘들게 살 때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손님은 다음날 코니아일랜드에 가자고 했다. 크레딧 카드는 물론 없다. 은행에 잔액이 겨우 10달러 정도였다. 이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그 10불을 이리 쪼개보고 저리 쪼개 봐도 대접할 빵과 달걀 그리고 우유를 사고 나면 코니아일랜드를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터질 것 같은 머리로 그 10달러를 찾으러 은행에 갔다가 차에 키를 놓고 차 문을 잠갔다. 여분의 키를 가지러 먼 길을 걸어 집에 왔다. 손님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키를 찾아 다시 은행까지 걸어갔던 시절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잘산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은 나를 철들게 했지만, 아직도 물귀신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훈훈하다. 가난했기에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을 읽고 위로해주는 독자를 만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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