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거리를 지나다 보면 길거리에 간이 천막을 치고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과는 달리 컴퓨터 앞에서 점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살기 좋은 요즈음 세상에도 답답한 사람들은 많은가 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공혜련이라는 점치는 여자가 있다. 한때는 이름에서도 풍기듯 중국 영화에 나오는 날렵한 주인공 모습이었다. 사십 후반으로 접어들자 통통하고 점잖은 모습이 그녀의 직업과 잘 어울린다.
공 여사는 아들 하나에 딸 일곱인 전라남도 시골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바느질 공장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남산 가는 길에 신문 배달하는 그녀를 처음 봤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찌나 화장을 곱게 했는지 잠에서 방금 깨어난 부스스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슬쩍 지나치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신문 배달이 끝나면 요구르트 배달을, 가정집의 도우미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바느질 공장에서 만난 그녀의 남편과 공장을 운영하다 망했다. 남편은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들 둘을 남겨 놓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그녀는 아들 둘을 키우며 반신불수가 된 친정엄마까지 모셨다. 틈틈이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자격증 그리고 고등학교 자격증을 받아 드디어는 동국 대학교 부설 명리 학과에 입학했다.
한문도 배워서 어릴 적부터 소소히 이 사람 저 사람 봐주던 일이 지금은 ‘혜련사랑’이라는 점집을 번듯하게 차렸다. 소문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꽤 온다. 그녀를 찾는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한번 손님으로 인연을 맺으면 소소한 질문은 무료로 일종의 에프터서비스로 늘 바쁘다.
그녀는 말이 없고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니만치 지금은 아는 것도 많고 자신감에 넘쳐 말도 잘한다. 서울에 나갈 때마다 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력의 대가란 이런 거구나.' 하며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어느 해부터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공 여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공 여사가 내 손금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어릴 때 바느질 공장에서 일하다 잘려 나가서 없고,
검지도 잘려 나간 손가락을 잘못 붙여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 여사가 말하는 나의 점괘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잘려 나간 손가락에 시선이 간다.
“공 여사 자신의 점괘가 몹시 궁금해?”
내가 물었다. 공 여사 자신의 점괘가 좋아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한마디 하니
“복채를 두둑이 내면 잘 봐줄게."
나의 점괘에는 관심이 없는 내가 얄밉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란다. 그녀는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란다. 그녀는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