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9, 2026

보내는 마음


2025년 12월 20일, 뉴저지 해켄색(Hackensack) Riverside SQ Mall에 있는 Riverside Gallery
에서 내 개인전 오프닝을 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바람도 쐬지 못하고 조명도 받지 못한 66점 작품이 갤러리 조명 아래에서 행복한 듯 밝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나는 평생 고등학교 시절과 같은 몸무게를 유지한다. 아직도 40여 년 전 옷들을 서너 벌 간직하고 있다. 옷장에 갇혀 나들이 못 하는 옷들에 미안해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입고 바람도 쐐주고 햇볕도 받게 한다. 내 작품들에도 전시회를 통해 바깥세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물건 사는 것을 싫어하지만, 일단 가진 물건에는 사람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미안해. 어두운 옷장 안에 가둬서. 내 작품들에도 미안하구나. 작업실에 처박아 둬서.”

하물며 오래전에 타던 빨간 차는 효녀 딸이라고 불렀다. 차를 타고 안자마자 

“효녀야, 오늘도 안전하게 돌아다니다가 무사히 집에 오자.”

11 동안, 사고 한번 없이 말 잘 듣던 차를 버리고 욕심내어 BMW 새 차를 뽑았다. 딜러 주차장에서 왜 나를 두고 가냐는 멀뚱한 모습의 효녀 빨간 차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눈물 흘렸다. “미안해. 너를 여기에 혼자 두고 나만 잘 살겠다고 떠나서.”

서울에서 만난 동기 왈; 너를 만나러 오기 전, 차를 폐차시키고 한 묶음의 꽃다발을 놓고 오는 중이야. 그녀의 여린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나 보다.


“우리 효자 안전운전 할거지. 너를 믿는다.”

BMW가 든든한 아들 같은 느낌에 효자라고 불렀다. 4만 마일까지는 잘 달리다가 워런티 끝나자마자 고속도로에 서서 말썽부렸다. 한번 고장 날 때마다 엄청난 수리비가 들었다. 불효자와 매일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다. 미련 없이 팔아 없앴다. 


사물에도 애착을 갖는 나에게 전시회가 끝나면 어찌 될까? 내 작업을 누군가 좋아서 가져가지 않으면 어두운 작업실에 도로 들어가 처박힐 것이다. 갤러리에서 밝게 빛나는 작품들을 둘러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내 작품이 좋다고 사길래 갤러리 주인에게 가격을 낮추라고 했다. 작품이 아늑한 집에 걸려 그들을 기쁘게 하고 편안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일수록 내가 끼고 있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분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림 가격을 낮춘다고 세상이 쪼개지는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멀리 보내 스스로가 홀로 서서 빛을 내며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

A Heart of Letting Go

On December 20, 2025, I had the opening of my solo exhibition at Riverside Gallery in Riverside SQ Mall in Hackensack, New Jersey.

Sixty-six artworks, which had been kept inside my studio without fresh air or light, were now under the gallery lights. They looked bright and happy, as if they were enjoying the moment.

I have kept the same body weight since high school. I still keep a few clothes from more than forty years ago. I feel sorry for clothes that stay in the closet for a long time, so once or twice a year, I take them out. I let them feel the wind and the sunlight.
In the same way, I try to show my artworks the outside world through exhibitions.

I do not like buying things, but once I own something, I feel a human-like connection to it. I often talk to my things quietly.
“I’m sorry for keeping you in a dark closet.”
“I’m sorry, my artworks, for keeping you trapped in the studio.”

I even called my old red car my “good daughter.” Before driving, I used to say,
“Good daughter, let’s drive safely today and come home without trouble.”

After 11 years without a single accident, I gave up that well-behaved car and bought a new BMW out of desire. At the dealer’s parking lot, I saw my red car looking at me, as if asking why I was leaving her behind. As she disappeared from sight, I cried.
“I’m sorry for leaving you here alone and going to live well by myself.”

A college friend I met in Seoul once said she took her car to the junkyard and left a bouquet of flowers there before coming to see me. Maybe her gentle heart touched mine.

I called the BMW my “good son.” I said,
“You will drive safely, right? I trust you.”

The BMW felt strong and reliable. It ran well until 40,000 miles. But as soon as the warranty ended, it broke down on the highway. Every repair cost a lot of money. Facing this ungrateful son every day became painful. I sold it without regret.

When the exhibition ends, what will happen to my artworks? If no one takes them home with love, they will return to the dark studio again. As I looked at my artworks shining brightly in the gallery, many emotions passed through my heart.
Thankfully, some close friends said they liked my work and wanted to buy it. I asked the gallery owner to lower the prices. I hoped the artworks would hang in warm homes, bringing comfort and joy.

Even if I lower the price of a good artwork, the world will not fall apart. It is better for my paintings to be loved by someone who truly cares.
This feeling is like a parent sending a beloved child far away, hoping the child will stand on their own, shine brightly, and live happily.

Friday, December 26, 2025

시아버지의 선물


나는 일주일에 나흘 정도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출근한다. 평생, 직장이라고는 거의 다녀 본 적이 없는 내가 12년 전에 맨해튼으로 이사 오면서 그린포인트에 놔두고 온 스튜디오에 판화 작업하러 가는 것이다. 정오부터 6시까지 작업하고 늘어진 몸을 질질 끌며 집에 온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아직도 기운이 있어 출퇴근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결혼하고 첫해 크리스마스였다. 시아버지가 보내온 비행기표를 들고 LA에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할 돈이 없어 판화를 액자에 넣어서 가져갔다.

“아버님, 선물로 제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판화가 아니냐?”

“네 저는 뉴욕에 와서는 판화 공부했어요. 학교 다닐 때 만든 작품이에요.”

“판화기가 있어야겠구나.”


1990년 어느 봄날, 시아버님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동봉한 큰 금액의 체크를 받았다.

“판화기를 사라. 공부한 것을 썩여서야 하겠니.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일에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꼭 판화기를 사서 작품에 전념해라. 난 너의 시어머니가 걱정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니. 나이 들어 소일거리 없이 자식만 바라보고 살 것이 걱정이다.“


그 해 따스한 봄날, 필라델피아 근교 판화 프레스기 판매하는 곳으로 향하는 시골길 여정은 아마도 내 생애에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님 감사해요. 열심히 작업할게요.’ 


나는 그린포인트에 살면서 작업실 마련하고 아이들 키우며 화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다. 그린포인트만 생각하면 암울한 기억으로 외면한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우리의 첫 작업실이었던 시커먼 팔각형 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버티고 있는 옛 염색공장 부근은 얼씬도 안 했다. 추위에 떨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판화에 손을 놓아서 잘되지 않더니 며칠 지나자 신나게 찍었다. 다시 예전,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연판을 닦고 문지르면서 몸은 고달프지만, 삶의 활력을 느낀다. 판에 그림을 그리고 판화기를 돌릴 때는 팔심 좋은 남편이 거들어 준다. 아이들도 가끔 들여다보며 작업이 잘 나왔다고 응원한다. 

“할아버지가 사준 판화기야.”

“알아요.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A Gift from My Father-in-Law

I go to Greenpoint in Brooklyn about four days a week. I hardly ever had a regular job in my life, but after moving to Manhattan 12 years ago, I kept my old studio in Greenpoint for printmaking. I work there from noon to six, then drag my tired body back home. I get exhausted, but I still feel proud that I have the strength to commute and work.

It was my first Christmas after getting married. My father-in-law sent us plane tickets, so we flew to LA. I didn’t have money for Christmas gifts, so I brought one of my prints in a frame.

“Father, I brought my artwork as a gift.”
“This is a print, isn’t it?”
“Yes. After coming to New York, I studied printmaking. I made this when I was in school.”
“Then you need a printing press.”

One spring day in 1990, I received a letter from my father-in-law with a large check inside.

“Buy a printing press. You shouldn’t waste what you studied. Supporting your husband and raising the children is good, but don’t stop doing what you love. Make sure you buy a press and focus on your work. I worry about your mother-in-law. The only things she knows are cooking, laundry, and cleaning. I’m afraid she will grow old with nothing to do and depend only on her children.”

That warm spring day, driving down a country road near Philadelphia to buy a printing press, was one of the happiest moments of my life. With tears in my eyes, I thought, “Father, thank you. I will work hard.”

When I lived in Greenpoint and had a studio, raised my children, and supported my artist husband. It was a hard life. Thinking about Greenpoint reminds me of dark and heavy memories. For many years, I avoided the old dye factory area where our first studio stood, with its tall, black, brick chimney. I still remember shivering in the cold.

After not doing printmaking for several years, I struggled at first. But after a few days, I began to enjoy it again. I felt like I had returned to my younger days. Cleaning and polishing the zinc plate is tiring, but it gives me energy and joy. When I draw on the plate and run it through the press, my strong husband helps me. The kids also stop by sometimes to cheer me on.

“That’s the press Grandpa bought.”
“I know. Grandpa was truly a good person.”

Friday, December 12, 2025

보일 듯 말 듯


내가 작기 때문인지 나는 덩치 큰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니와 거창한 것도 싫어합니다.

며칠 전 갤러리에서 만난 여자로부터 ‘영어 이름(sooim lee)을 왜 소문자로만 쓰느냐? 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전에도 서너 번 내 이름이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니냐? 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소문자로 쓸 때부터 뭔가 의도한 바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질문받고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다 보면 절대로 어디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제 나이 26살, NYU 재학 중에 만난 남자입니다. 그는 남미 콜롬비아에서 음악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써브웨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서 있던 그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 너 알아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흰 피부에 슬픈 잿빛 눈동자를 한 배우 Jake Gyllenhaal처럼 생긴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 기둥 뒤로 숨으려는 나를 본 그는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난 네가 사는 아파트 옆 건물에 살아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이웃 남자라니! 게다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가슴이 콩콩거려 무슨 말로 대응할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섬세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그는 얼마 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왜 학교도 끝나지 않고 떠나요?” 내가 물었을 때 그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냥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지난 삶을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도 타지를 떠돌까?’ 궁금해 구글링해 보고 싶지만,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만, 성은 외우기 어려워서 잊었습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그와는 반대로 뉴욕에 정착한 나는 나 나름대로 남과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다르다는 삶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그냥 내 작은 모습에 어울리는 작은 이름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원래 크고 굵고 충격을 주는 것보다는 보일 듯 말 듯 숨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선호합니다. 저의 그런 성향으로 판화 중에서도 날카로운 송곳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동판화(etching)를 전공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면서도 날카로운 가는 떨림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름을 소문자로 사용한다면 말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Almost Invisible

Maybe because I am small, I don’t like big, loud things or big, strong people. I prefer things that are simple and modest.

A few days ago, a woman I met at the gallery asked me why I write my English name (sooim lee) only in lowercase letters. I have heard similar questions several times before. I did have a reason when I started writing it that way, but after people asked me about it, I began to think about it more clearly.

In life, there are people you never want to meet again, and there are people you can never forget. There is someone I would like to meet again if I ever had the chance. I met him when I was 26 and studying at NYU. He was from Colombia and had come to study music. One day, after class, I was waiting for the subway to go home. He was standing nearby and suddenly spoke to me.

“I know you,” he said.

I was shocked. I never imagined a tall, handsome man—he looked like the actor Jake Gyllenhaal with pale skin and sad gray eyes—would speak to me first. I felt shy and wanted to hide behind a pillar, but he laughed and spoke gently.

“I live in the building next to your apartment.”

A neighbor! And from the same university! And he spoke to me first! My heart was racing, and I didn’t know what to say. He was quiet and sensitive, and not long after, he left for Europe. Before he left, I asked him, “Why are you leaving before finishing school?”
He answered calmly:

“I just want to live as a new person in a new place. And then move again and become someone else, forgetting the life before.”

Even though it was long ago, I never forgot his words. I wonder sometimes, “Is he still wandering in foreign places?” I wish I could search for him online, but although I remember his first name, I forgot his last name because it was hard to pronounce.

Unlike him, who wanted to live in places where no one knew him, I settled in New York. But in my own way, I also wanted to live differently from others. A different life, something quietly moving inside me, something small that matches my small presence. I wanted to live softly, almost invisible, like a small name written quietly.

I have always preferred things that appear and disappear, things that are faint rather than bold and loud. Because of that, I chose etching as my art major, creating images with a sharp needle on metal plates. I like delicate, faint lines that seem to tremble. Maybe that is why I use lowercase letters for my name—it matches who I am.

Friday, November 28, 2025

원숭이의 진실


‘원숭이는 사실 사람 말을 알아듣지만, 일을 시킬까 봐 모르는 척한다.’라는 인도네시아 속담이 있다.

“너 어디 가서 뭐 잘한다고 말하지 마라. 사람들이 일 시킨다.”

친정 엄마가 늘 나에게 하던 말과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절대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이지 않는다. 누군가 동참을 권유하면 깊이 생각한다.

‘과연 이 사람이 잘 리드할 능력이 있는가? 일하다가 싫증 나면 잠수 탈 인간인가? 본인이 꺼낸 말에 책임 있는 사람인가? 얼마나 끈질기게 일할 사람인가? 남을 배려하는 공감 능력이 있는가?” 

왜냐하면 이일 저일 다 끼어들었다가 낭패 보기 싫고 내가 원하는 일만 꾸준히 하고 싶어서다. 나는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쫓아낼 때까지 리더가 하라는 대로 따르며 질기게 붙어있다. 물론 이따금 푼수를 떨어 비난받을 때도 있지만, 내가 내 푼수 짓을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내가 속한 ‘수’ 북클럽 회장은 위 조건들을 다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질긴 질경이다. 나는 그녀의 남편을 1995년에 그녀보다 먼저 만났다. 내 남편이 한국에서 교수하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그는 서울로 나는 킨더 가든 다니는 아이 둘을 데리고 학군 좋다는 뉴저지 클로스터로 이사 갔다.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 파트타임 직장을 구하려고 찾아간 곳이 북클럽 회장님의 남편 회사였다. 면접 볼 때 경험도 없고 나이가 많다니까 사장님은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며 일하라고 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서 나는 사장님의 사모님을 북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뉴저지 노스버겐 카운티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20년 동안 선생 하다가 은퇴했다. 선배 전시회 오프닝에 갔다가 그녀가 내 예전 직장 사장님과 함께 있는 것을 봤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했더니 부부라는 것이다. 


옛 직장 사장님 부인은 내가 속한 북클럽과 글 클럽의 회장으로 모임을 오랫동안 리드하고 있다. 나는 리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에 그녀를 잘 따르는 것이 그녀를 돕는 것이라며 일상의 한 단면으로 습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