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29, 2023

개고생


서울에서 온 화가 전시회였다. 화가 부인을 소개받았다. 훤칠한 미모의 지적이며 단아하고 선한 인상이다. 그녀는 사려 깊은 모습으로 조용히 사람들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요 방정맞은  입에서 

“저도 화가 와이프이지만 화가 부인하느라 개고생 많이 하셨지요?”

눈물이 핑 돌아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가 말했다.

“개고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 편히 터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장 다니며 남편 서포트한 그녀의 사연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이지 화가 와이프 하기 쉽지 않다. 화가라는 직업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일단 없다. 꼴에 풀타임으로 작업하고 싶어 한다. 큰 작업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재료비는 말하면 잔소리다. 차라리 컴퓨터 하나만 들고 작은 공간에서 글 쓰는 소설가 부인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커다란 작업 공간에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없애고를 반복해서 겨우 만들어 낸 괜찮다는 작품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전시를 위해 사진 찍어야 하고 팸플릿 만들기 위해서는 글을 받아야 하고 운반해야 하고 오프닝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엄청나게 깨진다. 뭐 유명해지면 갤러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그전까지 뒤에서 물심양면 지원하는 부인들이야말로 개고생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로또 맞을 확률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가고, 또, 또 떨어져 나간다. 골인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부부가 합심해서 달려도 골인 언저리에 도달하기가 무척 힘들다. 


요행히 화가로 이름이 조금  날리면 혼자 노력해서 달려간 양 거들던 부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일쑤다. 그나마 조금 성공한 화가의 말이 생각난다.

“마누라 얼굴만 봐도 개고생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싫어.”

싫은 마누라 피해 밖으로 나돌다가 젊은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이어진다. 결국엔 조강지처는 버림을 받는다. 다행히 옆에서 후원한 와이프를 불쌍히 고맙게 여기는 화가도 있지만, 많은 남자가 그렇듯 성공하면 주위에 젊은 여자들이 달라붙는다. 젊은 여자가 좋지, 늙은 마누라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조강지처 버리고 잘된 화가를 못 본 것 같다. 게다가 화가는 자기는 재능을 선택받아 남과 다른 일을 하는 양 잘났다고 타협하지 않는다. 예민한 성질 또한 부인이 개고생하는 데 한몫 거든다. 글쎄 다른 화가들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의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보겠다.    


모처럼 식당에 갔다. 밑반찬이 주르르 나왔다. 

“이 반찬들 들락날락했던 것 아니야?”

“맛있어 보이는데 왜 또~ 밑반찬이 무슨 잘못이라고.”

조용히 깍두기만 우적우적 씹는 찌그러진 얼굴색이 좋지 않다. 

“항상 당신이 가자는 식당에 가다가 처음 내가 오자고 한 식당이잖아. 밑반찬 많이 나오는 식당이 싫다고 성질내는 인간도 있을까? 먹지 마. 내가 다 먹을게”

나는 반찬 접시마다 다 가져다 싹싹 먹어 치웠다. 남편이 가고 싶어 하는 김치 한 가지 나오는 설렁탕집으로 가지 않았다고 트집 잡기 시작하더니 짜증 내며 하루를 망친다. 

  

‘아이고 내 팔자야.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내 신세보다는 낫겠다. 내 나이도 절에서 받아줄까? 금전 두둑이 가져가면 받아줄까?’ 

항상 어딘가 튈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푼수처럼 ‘개고생’이라는 헛소리나 하고. 헛소리하며 스트레스 풀지 않으면 화가 부인으로 살아남기 정말 힘들어서다.

Going through very hard

It was an exhibition of an artist from Seoul. I was introduced to the artist’s wife. She is tall, beautiful, intelligent, and has a graceful and good-natured appearance. She was quietly listening to people with her thoughtful look. I blurt out. 

“I’m also an artist's wife, but you went through a lot of hard times that you’re an artist's wife, right?”

She stared at me with tears eyes and said,

"Hearing the word 'pain in the ass' makes me feel like I can say it out loud."

Her story of working and supporting her husband poured out.


It's really not easy to be an artist's wife. As an artist, there is no regular income. They want to be full time artists. They must have a large work space. Talking about the cost of materials is a nag. Wouldn't it be much better to be a novelist's wife who writes in a small space with just one computer? They may have their own circumstances, but there is no guarantee that even a decent work created by repeatedly creating and discarding numerous works in a large work space will sell.


The cost is enormous as they have to take photos for the exhibition, get texts to make pamphlets, transport them, and prepare for the opening. Well, when they become famous, they get help from the gallery, but until then, the wives who support them financially and spiritually behind the scenes are really suffering. Becoming famous is the chance of winning the lottery. After graduating from art college, they started running to become an artist. Among them, many fall away, and again, and again. Even if a couple runs together and does not give up, it is very difficult to reach the finish line.


If the artist is lucky enough to make a name for himself, his wife ends up as a duck egg in the Nakdong River. This reminds me of the words of a somewhat successful artist.

"I hate it when I see my wife's face because it reminds me of the days when I was in hard times."

He goes out to avoid a wife he doesn't like, and ends up in a relationship with a young woman. In the end, his wife is abandoned by him. Fortunately, there are artists who are grateful to their wives for their support, but like many men, when they become successful, young women stick around them. However, I don't think I've seen a successful artist after throwing away the supporting wife.

Moreover, the artist's sensitive temper also plays a part in his wife's difficulties. Well, I don't know about other artists, but let me give you a very small example from my husband.


We went to the restaurant for the first time in a while. Side dishes came out.

"Didn't these side dishes go in and out?"

"It looks delicious. What's wrong with side dishes?"

His crumpled face of quietly munching on only the radish kimchi is not good.

"Is there anyone who gets upset because they don't like a restaurant with a lot of side dishes? Don't eat it. I'll eat it all."

I brought every side dish and ate them all up. He starts blaming me for not going to a seolleongtang restaurant with one kind of kimchi that my husband wants to go to, and he gets annoyed and ruins the day.


"Oh, my fate. I'd rather be in the mountains practicing the Tao than in this position. Do you think the temple will accept me at my age? Would they accept me if I had a lot of money? “

I'm always looking for a place to escape, and talk like a fool of nonsense. It's because it's really hard to survive as an artist's wife unless I talk nonsense and relieve my stress.

Friday, December 15, 2023

남자 사람 친구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만나며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도 내가 싫지 않은지 개인적으로 연락하곤 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 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해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짐이 없는 거야.”

“혹시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꼴사납게 끝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와 어두워지는 길을 걸으며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는구나!’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며 조용히 걸었다. 뭔가 머릿속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흔들고 그와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진 그가 30여 년 만에 뉴욕을 방문해서 나에게 전화했다.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기억나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

“낮으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서. 하하. 반가워요. 어디예요?”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한때 좋아했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살다가 연락했을까?’ 여름 안개 저편 먼 곳에서 아른거리던 그리운 사람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속삭이는 듯 기분이 들떴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그가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다소곳이 인사했다.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나에게 ‘친구’를 강조했구나.’ 


나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그와 내가 알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내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높은 톤으로 또박또박 잘 들으라고 지껄여 댔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나는 저절로 맥이 풀리며 조용해졌다.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 추가 멈춘 듯 그와의 시간이 뚝 멈췄다. 그는 나의 수다가 끊긴 분위기에 눌렸던지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싱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일어났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쳐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 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만남과 헤어짐처럼 분홍빛으로 타오르던 노을이 어둠 속으로 차갑게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씁쓸했다.

A male friend

There was a senior I used to like while meeting with my friends. He used to personally contact me as if he liked me. I wanted to make sure of his feelings. One day, on the way home from a meeting, I asked him. 

"What kind of relationship do we have?"

"Friends."

He replied without hesitation. 

"I've had girls I've dated and broken up with reach out to me before to see if we could work things out again. I don't reach out to girls I've dated and broken up with, but I don't break up with friends."

"Well, if we do end up breaking up as friends, I hope it doesn't end ugly."

Walking on the dark path with him, 'This man doesn't like me and thinks of me as just a friend!' I walked quietly in some mysterious embarrassment. I waved at the bus stop with something unfinished in my mind and broke up with him.


After we broke up, he visited New York for the first time in 30 years and called me.

“Do you remember me?” It’s a familiar voice.

“Ah~ I remember.”

“How do you know my voice so quickly?” “

“Because the low yet sweet voice is attractive. haha. Nice to hear from you. where are you?"

I asked, and he answered.

“Can we meet and talk?”

“Can we talk more on the phone?”

I wanted to talk to him at length.

“Because something like that happened. “I’ll meet you and talk to you.”

I can't believe I can meet a man I once liked again. Because does he contact me while living without forgetting me?' I felt excited, as if a nostalgic figure from far away in the summer haze had suddenly come to my side and whispered to me.


Entering the cafe, he approached with a bland smile. He reached out his hand a little shrunken like an apple that began to drain. Behind him, the woman faltered and followed somewhat neatly.

"It's my wife."

Why didn't I think he'd come with his wife? A woman with a real impression greeted me rather politely. 'You've emphasized 'friend' to me in search of such a real woman.'


I excitedly shared the news about the friends we knew who had been visiting New York. But isn't his wife whispering in his ear as if she were interpreting what I said? I asked because it was strange.

"I couldn't hear well. That's why I couldn't talk on the phone."

I brought my body close to his face and told him to listen carefully in a high tone. He just nods his head and doesn't say anything. I naturally became quiet.


Before meeting, hope wandered through my head for a while, then slowly slipped out, and the time with him stopped as if the pendulum had stopped. As if he had been pressed by the atmosphere where my conversation had ended, he pointed his head at the clock and woke up with a bland look on his face. The sunset, which burned pink like a meeting and a breakup, faded into darkness. It was bittersweet.

Friday, December 1, 2023

힙(hip)한 한옥마을


”군대 가도 괜찮아요.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은 스마트해요. 음악, 드라마, 영화 잘 만들어요. 나는 한국 이름을 가진 것이 근사해. 엄마, 온 가족이 함께 한국에 가자.”

한류 덕분인지 아이들은 자신들이 한국인임을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미국에서 결혼했고 한국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도 한국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남편이 영주권자일 때 아이를 낳아서 홍준표 법(지랄 같은 법)으로 이중국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 이름이라서 잘못 걸리면 군대에 끌려갈지도 모른단다. 아이들 말에 힘을 얻어 일정을 짜라고 했다. 물론 우리 부부가 여행 비용을 전부 지불하는 것이다.  

서울 첫날, 종로3가 인사동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먹으러 밖에 나갔다.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몰려다니며 술 마시고 취해서 떠들어도 주변에 경찰 한 명 볼 수 없었다. 밤 문화를 활기차게 사고 없이 즐기는 그들이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다.


다음 날 새벽, 남편과 해장국 집을 찾아 나섰다. 그 많던 음식점 앞 포장마차가 포장을 내려서인지 완전히 다른 길거리로 보였다. 청소부 아저씨들이 전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고요한 고국을 걷는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60년 된 후줄근한 국밥집에 들어가 막걸리와 국밥을 먹었다. 가격도 싸고 꽤 맛있다.  


아이들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 쪽으로 걸었다. 골목을 돌다가 아이들은 빵집으로 나는 그 옆 김밥집에 들어갔다. 김밥을 싫어하는 남편은 ‘김밥 먹으려고 한국에 왔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나 김밥, 오뎅, 떡볶이 먹고 싶어 한국에 왔다. 어쩔래.’ 하는 심사로 남편과 눈 맞춤을 피했다. 밖에 우뚝하니 서 있던 남편이 슬쩍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렇게 맛있어?”  

오뎅을 먹어보더니 김밥도 집어 먹었다. 아이들도 빵을 사 들고 와서 합세했다. 맛있다고 계속 주문했다.  

“아들이 둘인가 봐요? 나는 셋인데.”

식당 주인아줌마가 물었다. 아줌마의 든든한 아들 셋이 주방과 홀에서 각자 일을 하다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선한 인상들이다. 맘씨 좋은 아줌마의 한마디가 왜 그리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따뜻하게 들리던지! 여행 중에도 아이들은 아들 셋 아줌마 김밥이 제일 맛있다며 다시 한번 가자고 했지만, 시간상 인사동에는 갈 수 없었다.


저녁에는 호텔 앞, 힙(hip)하다는 익선동 골목을 걸었다. 익선동은 100년 전 서민을 위해 지어진 15평 미만의 조용한 한옥마을이었다. 2010년부터 한옥을 변경한 작은 카페들과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서서 젊은이들의 데이트코스가 되었다. ‘젊음이 좋긴 좋구나.’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우리 부부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The trend hanok village

Thanks to the Korean Wave, my sons are very proud to be Korean.

"Korean people are smart, they make great music, dramas, and movies, and it's cool that I have a Korean name. Mom, let's go to Korea with the whole family."


We got married in the U.S. and didn't register our marriage in Korea. Of course, we didn't register our children in Korea either. I had the children while my husband was a permanent resident, so they became dual citizens under the Hong Jun-pyo law (which is a shitty law). Worse, because of their Korean name, they could be taken to the army if they are caught. 

"I don't care if I go to the army, I want to go to Korea"

Encouraged by their words, I told them to make an itinerary. Of course, my husband would pay for the entire trip. 


On our first day in Seoul, we unpacked at our hotel in Insadong, Jongno 3, and went out for dinner. It's a wild night. It's full of young people. Even with so many people milling around, drinking and getting drunk, there was not a single cop in sight. They are the descendants of the Bureau of Oriental Courtesy, enjoying the nightlife lively and without incident.


At dawn the next day, my husband and I went out to find a place to eat hangover soup. Perhaps because many of the food stalls in front of the restaurants had taken down their packaging, it looked like a completely different street. It didn't feel real that I was walking through my quiet homeland, where street sweepers were clearing away the trash left by people the day before. I went into a cozy 60-year-old soup restaurant and had makgeolli and soup. It's cheap and quite delicious.


I walked with my kids towards Bukchon Hanok Village. After turning into an alley, they went to a bakery and I went into a kimbap restaurant next to it. My husband, who doesn't like kimbap, shook his head with a pathetic expression, 

"Did you come to Korea to eat kimbap?". 

"Yes, I came to Korea to eat kimbap, oden, and tteokbokki, so what?"

My husband, who was standing outside, slipped in and sat down next to me. 

"Is it really that good?" 

He tried the oden and ate some kimbap. The kids joined in. They kept ordering more. 

"You must have two sons, I have three."

The restaurant owner asked. Her three trusty sons greeted us while working in the kitchen and hall. They made a good impression. 


In the evening, we walked through the hip Iksun-dong alley in front of the hotel. Iksun-dong was a quiet hanok village of less than 15 square meters built for the common people 100 years ago. Since 2010, small cafes and shops in converted hanoks have been lining the streets, making it a popular date spot for young people. I looked at them with envy and wondered what older people like us were doing at this hour. I wond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