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 떨며 이일 저일 하는 나에게 남편이 물었다.
“머리가 또 돌기 전에 해 놓지 않으면 안 돼.”
며칠 전부터 이석증이 오려고 어찔어찔하다. 눈을 감으면 파도가 내 이마를 향해 밀려오거나 뿌연 물체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는데. 면역이 떨어졌나? 1989년 12월 말에 이석증이 처음 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냉골이었다. 생활고로 밀린 청구서는 쌓였고 냉장고는 텅텅 비었다. 산후조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먼 동네 이야기였다.
갑자기 머리기 핑 돌았다. 천정과 바닥이 파도치듯 위아래로 널뛰었다. 누군가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마구 돌리는 듯했다. 남편을 향해 두 손을 쳐들고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세탁기가 속도를 올린 듯 머리가 더 빨리 돌았다. 나는 토하고 설사했다. 아이는 울고 남편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했다. 앰블런스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이 분유 살 돈도 없었다. 병원 빌을 받고 또 도느니 차라리 죽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텼다.
그 이후로도 으스스 추운 날, 스트레스 받으면 이석증은 도진다. 멀미약 (meclizine)을 먹고 자다가 깨어나면 마치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후 청명한 하늘이 ‘놀랬었지?’ 하고 약 올리는 듯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은 요령이 생겨 이석증 전조증상을 눈치챌 수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돌기 전에 약을 먹는다.
자면서 좌우로 빨리 뒤척이면 어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도, 차를 타고 발밑을 내려다봐도 어찔어찔하다. 운전을 포기한 지 오래됐다. 스트레스 받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어지럼증 때문에 정신이 말짱할 때 미리미리 할 일을 해 놓는다. 내야 할 빌도 내고, 김치도 담그고 집안 정리도 바로바로 한다. 아파도 깨끗하게 정리 정돈된 집안에서 누워있고 싶어서다. 그런데 문제는 말짱할 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일을 빨리하려다가 돌 때가 있다.
“나 건드리지 마. 머리가 돌려고 해.”
나의 서늘한 한마디에 집안 식구들은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인들에게 휘둘릴 때가 있다. 나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한다. 대꾸하며 끼어들었다가는 머리가 돌기 때문이다.
이석증이 무척이나 괴로운 증상이지만, 죽을 날자 받아 놓은 심정으로, 정신 말짱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나는 빡세게 산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이석증을 대비하며 살다 보니 치열하게 일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왕 생긴 이석증을 몸의 일부로 껴 앉고 살며 좋은 쪽으로 이용하면 나쁜 것이 굳이 나쁘지 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