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4, 2019

수양버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옛날 사진 좀 없으세요?” 그간 뉴욕에서의 작품 활동을 되돌아보는 전시회를 꾸미는 화랑에서 온 전화다. 부리나케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뒤져 먼지를 뒤집어쓴 앨범을 찾았다. 부산 피난 후 올라와서 60년대 초 서울 변두리에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거들면서 지은 첫 우리 집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한여름에 누이동생과 함께 수세미가 주렁주렁 달린 앞마당 사진이다. 그 시절 집안에 기르는 화초라고는 거의 땅바닥에 붙어서 피는 채송화, 멋대가리 없는 검붉은 맨드라미,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 어쩌다 귀하게 구한 백일홍 그리고  까만 씨를 맺는 분꽃 정도였다.

서울 외곽에 지은 집 동네에는 전기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집에 오시면 남폿불에 씌운 유리 커버의 그을음을 반짝거리게 닦는 일이 저녁 일과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등 필라멘트가 투명하게 보이는 백열전등을 볼 때면 반짝이던 남포등이 상기된다.

아버지는 월남 후 전쟁과 피난 생활을 겪고 나서 손수 마련한 집 아담한 정원에 애착이 크셨다. 그 당시 서울 변두리에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꽃모종인 박하 꽃, 장미 등을 구해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져와 정성 들여 심으셨다. 특히 붉은 장미는 크게 번식하여 주변 이웃에게 빨간 장미 집으로 불리곤 했다. 집 공사가 거의 끝날 즈음 봄에 땅에 꽂기만 하면 쑥쑥 자라는 수양버들 가지를 얻어다 심었다. 한 참 후 집안 한쪽을 가릴 만큼 크게 자라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미국으로 떠났다.

몇십년 후, 그 집 지을 때 거들었던 외삼촌에게 옛집에 관해 물었다. 그 동네가 거의 아파트가 들어서서 찾기도 쉽지 않을 거라면서 그 버드나무는 얼마 전까지 아름드리로 남아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우리 집은 야외 영화 촬영이 있으면 온 야산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던 연합 촬영소 옆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영화사 사장님이 김진규 주연의 이순신을 찍을 때 이북식으로 풍구 위에 톱밥으로 밥해 먹던 우리 집에 와서 해전 장면을 찍을 때 필요한 연막용으로 톱밥을 한 포대를 얻어갔던 기억도 난다.

시아버지처럼 뜰에 대한 애착이 많은 남편은 봄이 오면 꽃씨를 심어야 한다면 홈디포를 들락거린다. 너무 일찍 심어 추위에 죽었다며 저녁 밥상에서 매년 들어야 하는 남편의 어릴 적 살던 집 이야기다.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동네에서 톱밥을 때서 아궁이에 한 밥을 먹고 들에서 누런 벼메뚜기 잡아 구워 먹고, 늦가을 김장용 무를 캐 먹으며 흙냄새 속에서 자란 남편은 이야깃거리가 많아 참 좋겠다.

콘크리트 속에서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 구수한 이야기 거리가 없는 나는 요즈음 글 쓸 거리가 없어 고민이다. 그 옛날 모습을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구식 영사기에서 끄집어내듯 어릴 적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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