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10, 2023

레몬 나무 그림자

“너 요즈음도 신문에 글 쓰니?” 나와 전화 통화하던 친구가 물었다.

“글 쓸 소재가 없어서 끙끙대고 있어.” 

“너 옛날에 차 타고 가다가 화가 난 네 남편이 너를 길가에 버리고 간 글이 기억에 생생하다.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써라” 

“처음 신문에 글쓰기 시작할 때는 고생했던 기억의 쓴물이 솟아나서 토해내듯이 썼는데. 다 뱉고 나니 더는 그런 소재가 없어. 나이 들고 먹고살 만하니까 남편과도 싸울 일도 없고. 크루즈 타고 여행한다는 글을 가끔 쓰긴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 인듯  편치 않고. 고민이야.”


나의 넋두리가 길게 이어지는 중, 전화선 너머로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산책하니?”

“아니, 뒤뜰로 나왔어.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옛날 이야기하니까 담배가 땅기네.”

우리의 대화 중 젊은 날의 즐거움과 회한이 그녀를 자극했나 보다. 나는 친구를 닮아 밝게 빛나는 그녀의 집 뒤뜰에 있는 200개의 레몬이 열린다는 나무가 생각났다.

“너 레몬 나무 아래서 담배 피우고 있지? 여기까지 레몬 향을 품은 담배 냄새가 난다.”


대학 다닐 때는 친하지 않았던 LA에 사는 친구다. 학교를 졸업한 그해, 늦가을 나는 직업, 결혼, 등을 고민하며 안국동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나를 본 이 친구가 내 모습이 가련했는지 큰소리로 나를 불러세웠다.

“야 반갑다. 너 어디 가니?”

“그냥, 근처에 왔다가 집에 가는 중이야.” 소심한 나는 활달한 그녀를 약간 경계하며 소리죽여 말했다.

“내 화실이 이 근처야.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함께 가서 한잔하자.”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반응에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갔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리되지 않은 어두운 화실 안을 살피려고 눈동자를 확장하려는 순간, 훤하게 빛을 발하는 덩치가 큰 잘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남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두 청춘 남녀 사이에 끼어있자니 무척 불편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친구들이 들이닥칠 거라며 더 놀다 가라는 그녀의 친절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는 화실에서 작업도 하고  잘생긴 애인도 있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젊음을 한껏 즐긴다.’는 것에 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안국동 돌담길을 걷다가 저녁놀이 뜨고 지고 어스름한 밤이 올 때까지 광화문 정류장에 마냥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이끌어주길 기다리듯이.


우리는 우연히 같은 해 미국에 왔다. 친구는 그 멀쩡하고 덩치 큰 남자와 결혼하고 LA로 이민을 왔다. 나는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뉴욕으로 왔다. 그녀와 나는 전화 통화만 하다가 가물에 콩 나듯 LA와 뉴욕을 오가며 만난다. 고민 많던 그 시절, 나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내 기억에 각인되어 나는 그녀와의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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