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31, 2024

홍대는 브랜드 네임


많은 간판에 ‘홍대’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학교 교정을 걸었다. 70년대 우리 부부가 다녔던 학교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와우산 밑, 미대, 상대, 공대만 있었다. 미대 건물이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허허했었는데. 종합대학이 된 지금은 건물들이 빽 꼭 들어차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내가 즐겨 앉아 친구를 기다리던 의자도 찾을 수 없었다. 

교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던 카타리나 다방은 그 당시 슬금슬금 피기 시작한 대마초 아지트였다. 눈빛을 번득이는 보건소 직원들의 급습으로 적지 않은 애연가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왼쪽에는 꼰대들이 갈 것 같은 유정다방이 있었다. 철도 길가에 초라한 술집이 줄줄이 있었는데 철길을 걷어 내서인지 옛 기억을 되살리는데 한동안 헷갈렸다. 사방팔방이 먹고 마시는 식당과 쇼핑가다. 과연 내가 4년을 다녔던 학교가 맞나 의심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남편과 산책하며 쇼핑가를 기웃거리면서 앞뒤 좌우를 유심히 살펴봤다. 당시 당인리 발전소로 가는 철도 길이 중요 관광 상품을 취급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남편은 나와 달리 기억을 많이 했다. 나는 주로 함께했던 학우들의 연인 관계 ‘누가 누구와 데이트하다 차이고.’ 등등을 기억하고 남편은 학교 주위 환경과 그 당시 미술 흐름을 기억했다.  


아이들은 뉴욕에 두고 온 여자 친구에게 준다고 올리브 영에 들어가 쇼핑했다. 여자 친구와 다시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큰 아이에게 ‘그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귈 수나 있을는지?’라고 말하려다  

“내년에 한국 방문할 때는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해라. 엄마가 오래전에 골굴사에서 템플스테이 할 때, 핀란드 사람이 신혼여행도 왔더라. 온돌방이 따뜻하고 밥도 맛있었어. 며칠 동안 침묵 명상하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지하철이나 기차에서도 예전에 알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아줌마들이 말을 걸어온다. 내가 몇 마디 마지못해 예의상 대꾸하면 남편이 끼어들어 아줌마와 이 얘기 저 얘기 옛 여인을 만난 듯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엄마, 한국 아줌마들은 착하고 다정해요. 아는 사람처럼 말을 걸어요.”

“한국인은 가무를 좋아하는 정 많은 민족이란다.” 


쓸 수 있을 때까지 다 쓰고 만약 재산이 남겨진다면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지. 그들과 여행하며 함께 쓰고 가는 것이 더 낮겠다고 생각했다. 달러 강세가 한몫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돈 안 쓰고 몸만 따라와서 공짜로 여행하는 것이 신나는지 

“엄마, 내년엔 대만에 가요.” 

내 돈 쓰며, 입 다물고, 참견하지 않고, 아이들 말 잘 듣고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여행을 매년 할 수는 없겠지?

“내년에 엄마 아빠는 바빠. 내 후년에나 가야지. 이번에 쓴 크레딧 카드 비용이나 일단 지불하고 다시 생각해 보자.” 

Hongdae is a brand name

Many signs have the word "Hongdae" written on them. We walked around the campus. There was no trace of the school my husband and I attended in the 70s. At the foot of Wausan, there used to be only the College of Fine Arts, the College of Business, and the College of Engineering. Now that it's a comprehensive university, the buildings are so packed that I couldn't tell where anything was. I couldn't even find the bench where I used to sit and wait for my friends.


To the right of the school gate used to be the Katarina Cafe, which had quietly become a den for marijuana smokers back then. Health officials with sharp eyes would raid the place, causing quite a bit of trouble for many smokers. On the left was Yujeong Coffee House, where the older folks used to go. Along the railway tracks were shabby bars in a row, but I was confused for a while because the tracks seemed to have been removed, making it hard to revive old memories. Now, the area is full of restaurants, bars, and shopping districts. I wondered if this was really the school I had attended for four years.


The next morning, my husband and I strolled around the shopping area, closely observing everything. The railway line to the Danginri Power Plant had turned into a spot dealing in important tourist products. Unlike me, my husband remembered a lot. While I mostly remembered who was dating whom among our classmates, my husband remembered the surroundings of the school and the art trends of that time.


Our children went into Olive Young to shop for gifts for their girlfriends left back in New York. I almost said to my eldest, who plans to visit Korea with his girlfriend again, 'Do you think you'll still be together by then?' but instead I said,

"Next year when you visit Korea, try a temple stay. When I did a temple stay at Golgulsa long ago, a Finnish couple even came there for their honeymoon. The ondol room was warm, and the food was delicious. After a few days of silent meditation, the world looks different."


On the subway or train, Korean ajummas strike up conversations as if they've known me for a long time. When I reluctantly respond out of courtesy, my husband jumps in, chatting excitedly with them like he's meeting an old flame.

“Mom, Korean ajummas are kind and friendly. They talk to you like they know you.”

“Koreans are warm-hearted people who love song and dance.”


If I have any wealth left, I won't leave it to the children. I think it would be better to spend it traveling with them. The strong dollar has also played a part in this travel. The kids seem thrilled to travel for free, without spending any money.

“Mom, let’s go to Taiwan next year.”

I can't take a trip every year where I have to spend my own money, shut up, stay out of the way, listen to my kids, and follow them around, can I?

“Your dad and I will be busy next year. First, let’s pay off the credit card bill from this trip and then think about it.”

Friday, May 17, 2024

TV 도둑


결혼 초 우리 부부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이 살았다.

하루는 남편이 밖에 버려진 조그마한 흑백 TV를 주워 왔다. 신이 났다. ​​웬걸,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심할 때마다 화면만 들여다보며 소리는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느 날, 운 좋게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텔레비전을 또 주워 왔다. 화면에서 비가 쏟아졌지만, 소리는 나왔다.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비 쏟아지는 화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봤다.


어느날 예기치 않은 돈이 조금 생겼다. 작은 소니 텔레비전을 장만하고 고장 난 것을 버렸다. 새것을 즐기던 중, 채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도둑이 가져갔다. TV를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던 길 건너 남자가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훔쳐 갔다고 이웃이 말해줬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로 약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살 돈도 없지만, 다시 산다 해도 또 도둑이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버린 그 고장 난 소리만 나오고, 화면만 나오는 TV를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TV 없이 살았다. 매년 LA 사시는 시아버지가 보내오는 비행기 티켓으로 연말에는 시집에 갔다. 시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티브이에 눈을 박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시아버지가 혀를 차시며 

“텔레비전 없이 사는 것이 아이들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도 제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사주겠다.”

“돈으로 주시면 저희가 뉴욕에 돌아가서 살게요.”

“아니다. 돈으로 주면 사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내가 여기서 사 줄 테니 가져가거라.”

시아버님은 커다란 산요 TV를 사서 비행기에 실어주셨다. 


LA에서 집에 돌아오니 문은 열려있고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둑이 하도 집안에 훔쳐 갈 것이 없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시고 화가 났는지 몇 개 없는 가구를 다 내동댕이쳐 놨다. 새로 장만한 TV를 도둑맞을까 봐 우리 식구 넷은 지키는 데 고심했다. 1980년대 범죄율이 치솟던 시절의 동네가 점점 변하면서 도둑님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개를 끌고 나갈 때마다 ‘뭐 쓸만한 물건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작은아들의 심리를 잘 아는 강아지가 

‘너 이거 가져갈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멈췄더니 ‘가져가라는’ 메모가 붙은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가 있어서 주워 왔단다.

“꽤 괜찮은데. 새것이나 다름없네.” 


우리 식구들은 집안에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샀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주웠냐?’고 물어본다. 집 주변에 멀쩡하게 버려진 이케아 가구들을 주워 살기 때문이다.

TV thief

At the beginning of our marriage, we had very little money. We lived without a television or radio.


One day, my husband picked up a small black-and-white TV that had been thrown away outside. I was excited. Sure enough, it had a picture, but no sound. Whenever I was bored, I would stare at the screen and imagine the sound. One day, we were lucky enough to find another TV that was about the same size. Rain was pouring out of the screen, but there was sound. We put them side by side and watched with a towel over the rain pouring screen.


We had some unexpected money. We bought a small Sony television and threw away the broken one. I was enjoying my new purchase, but it lasted less than a week before a thief stole it. My neighbor told me that a man across the street, who had bought the TV and was watching us come home, stole it while we were away. We couldn't take any action for fear of being harmed if we touched him wrongly. He was a drug addict who would do anything to get money to buy drugs. 


We didn't have enough money to buy a TV, but even if we did, the thieves would probably take it again, so we regretted that we threw away the broken TV that made only sound and only showed a screen. Children were born. We lived without a TV until they were in elementary school.


Every year, we went to my father-in-laws' house at the end of the year with a plane ticket sent by him, who lives in LA. Upon arrival, the children were glued to the TV and refused to move. When the father-in-law saw this, he clicked his tongue and said 

“Living without a TV is not only good for their education. They need to see the world through their eyes, so I'll buy it.”

“If you give me money, we'll go back to New York and buy it.”

“No, no. If I give you money, you won't buy it. I'll buy it for you here, and you can take it with you.”

My father-in-law bought a big Sanyo TV and put it on the plane. 


When we came home from LA, the door was open and the house was in chaos. Since there was nothing for the thief to steal in the house, he drank the beer in the refrigerator and threw down all the furniture in his anger. My family of four struggled to keep our new TV safe for fear of having it stolen. During the crime wave of the 80s, the neighborhood changed and the thieves disappeared.


Every time my son take the dog out, The dog knows well the psychology of my younger son.The dog looked at him with an expression like ‘Do you want to take this?’, so I stopped and there was a TV with a thin body and a large screen with a note saying ‘Take it’, so I pick it up.

“It’s pretty good. “It’s as good as new.”


In my family, when something new comes into the house, we don't ask, “Did you buy it?” we ask, “Where did you find it? This is because we live on discarded IKEA furniture lying around the house.

Sunday, May 5, 2024

프라다 짝퉁 여사


명동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친구 둘과 식당에 들어갔다. 각자 다른 음식을 주문했다. 식사 시작하기도 전, 웨이트리스가 식사 요금 영수증을 나에게 줬다. 영수증을 받아 내 옆에 놓는 나에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친구가 

“그거 이리 줘.”

“왜. 그냥 여기에 놔두고 밥 먹자.”

“이리 줘. 네가 영수증을 가지고 있으면 불편해서 내가 밥을 편히 먹을 수 없단 말이야.”

“누가 내면 어떠냐. 선물도 사가지고오지 않았는데.”

친구는 기어코 영수증을 뺏어 갔다. ‘밥값 영수증을 본인이 들고 있어야 편히 먹을 수 있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가 문득문득 가슴을 두드리며 떠오른다. 


나는 단 한 번도 한국에 나갈 때 친구들 선물을 챙겨 간 일이 없다. 쇼핑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결국 쓰레기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다. 그 대신 항상 밥값을 내려고 하지만, 친구들이 그것 또한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미국에 와서 처음, 서울을 방문 했을 때 친구 남편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사람이 어째 빈손으로 올 수 있어. 다문 넥타이라도 하나 사 오지 않고.”

아마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는지? 어떠한 비난을 들어도 절대로 선물은 챙기지 않다가 습관이 되었다. 원래 주고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몫한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도 양말 한 짝 사가지고오지 않는다. 비행기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가방 한 개 이외는 또 다른 짐을 더 만들고 싶지 않다. 쇼핑할 시간도 없고 사고 싶은 것도 없다. 뉴욕에서 심플한 디자인 옷을 더 싸게 구입 할 수 있다. 미국에 살아야 하는 팔자려니 생각하고 식재료도 뉴욕에서 사서 먹는다. 조금 더 질 좋은 것을 먹는다고 건강해질까? 입보다 마음의 평화가 우선이다. 


“엄마도 브랜드 네임 좋아해요?”

아이의 질문에 무슨 말인지 몰라 

“왜?.”

“엄마 프라다 신발 신어잖아요.”

“프라다? 이게 프라다 신발이니? 저번에 한국 갔을 때 홍대 앞 신발가게에서 3만 원짜리 신발 디자인이 너무 괜찮기에 사서 신고 왔는데. 짝퉁 프라다인가 봐?”

“진짜인 줄 알았어요. 엄마가 신으니까, 가짜로 보이지 않아요.”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처럼 진짜냐, 가짜냐에 따라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것보다는 아예 미리부터 3만 원짜리 짝퉁 신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Mrs. Prada knockoffs

I was wandering through Myeongdong Alley and entered a restaurant with two friends. We each ordered different food. Before we even started eating, the waitress gave me a receipt for the meal. As I took the receipt and placed it next to me, my friend sitting across from me said 

“Give me that.”

“Why? Let's just leave it here and eat.”

“Give it to me. I don't feel comfortable with you holding the receipt and I can't eat comfortably.”

“I should pay, I didn't bring any gifts.”

My friend snatched the receipt from me. 

'She can only eat comfortably if she holds the receipt herself,' my friend's words from time to time hit my heart. 


I have never brought gifts for friends when I go to Korea. I hate shopping, I don't know what they like, and I think I'd end up bringing trash to them. Instead, I always try to pay for their meals, but sometimes they don't allow me to do that either. 


When I first visited Seoul after coming to the U.S., my friend's husband said in a sarcastic tone,

“How can you come here empty-handed?”

Maybe it was because of that sound? I never brought a gift, no matter what the criticism, and it became a habit. It's also because I don't like giving and receiving. Even when I visit Korea and return, I don't bring a pair of socks. I don't want to pack another bag other than the one I drag onto the plane. I don't have time to shop and I don't want to buy anything. I can buy simple, well-designed clothes cheaper in New York. Also I don’t bring Korean food to New York. Will eating better quality Korean food make me healthier? Peace of mind comes first. 


“Mom, do you like brand names too?”

I don't know what my sons question means

“Why?”

“Because you wear Prada shoes.”

“Prada? Are these Prada shoes? Last time I was in Korea, I bought a pair of shoes for 30,000 won at a shoe store in front of Hongdae because the design was so nice. Are they fake Prada?”

“I thought it was real. “Because you wear them, It doesn’t look fake.”


A thought briefly crossed my mind that it would be better to wear a 30,000 won counterfeit piece and live comfortably than to have the course of my life change depending on whether it is real or fake, like Maupassant's ‘pearl neck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