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으로 가는 78번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모처럼 온 버스가 설 생각도 없이 달려가다 저 멀리 섰다. 잡아타려고 쫓아갔지만, 버스는 떠나버렸다.
먼 길을 걸어 집에 들어서며 엄마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물으니 절에 갔단다. 며칠을 기다려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갔다는 절을 찾아 이산 저산 헤맸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만치 떠나는 버스 뒤에 흰옷을 입은 엄마가 내게 손짓을 하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온 힘을 다해 버스를 따라갔지만, 버스는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엄마를 부르며 울다 꿈에서 깨어났다.
교실 문이 열리며 급히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뭔가를 전달하러 왔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사형 선고를 받는 심정으로 선생님의 입이 열리기만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다 엄마 소식이 아니면 긴 안도의 숨을 쉬곤 했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밖에서 놀면서도 그사이에 엄마에게 변고가 생겼을까 봐 불안했다. 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엄마를 먼저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내려놨다.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 엄마를 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면 코 밑에 손을 대고 엄마가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니.
엄마는 나보다 다섯 살 밑의 여동생을 낳다가 하혈을 많이 해서 호르몬에 관계된 병을 앓게 됐다고 한다. 난 지금까지도 정확한 병명을 모른다. 그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병원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늘 아파서 누워 있던 모습뿐이다.
이런 엄마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병이 조금 쾌차하여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어디든 쫓아다녔다. 가까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엄마를 따라가 절 마당에서 엄마의 하얀 고무신을 지켜보며 놀았다. 친지를 방문할 때도 그 집 대문 기둥을 붙잡고 놀며 엄마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런 나를 한사코 떼어놓고 가려는 엄마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엄마가 죽을까 봐 쫓아다닌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엄마가 어찌 되었을까 하며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엄마를 가까이 두고 기다리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나도 내 갈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쫓아다니던 엄마를 두고 미국에 왔다. 처음에는 걱정되어 전화도 자주 하고 편지도 곧잘 하더니 나 살기 바빠 연락도 뜸해졌다. 흰옷을 입고 버스 뒤에 서서 손을 흔들던 엄마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느라 나에게 찾아왔었나 보다.
강이 저 멀리 굽어보이는 쓸쓸한 곳에 묻힌 엄마 산소에 갔다. 혹시라도 땅속에 묻힌 엄마의 ‘잘 가라’는 인사라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누워서 귀를 땅에 대 보지만, 들리는 건 강물 소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