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6, 2011

영주권이 뭐길래

“큰아비가 결혼할 것 같다!” “갑자기 결혼이라니요?”

7년 전에 상처한 아주버님은 워낙 소극적인 성격이라 번듯한 데이트 한번 못 해보고 외롭게 지내오셨다. 그런 아주버님이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것도 상대 여자가 적극적으로 서두른다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결혼할 여자가 아직 영주권이 없다고 했다.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영주권 때문에 시민권자인 우리 아주버님을 이용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감돌았다. 평소 집안 대소사에 무심한 편인 나였지만, 이번 혼사만큼은 도저히 팔짱만 끼고 볼 수 없었다. “어머니, 절대 집안 식구 누구도 그 사람 앞에서 영주권 얘기는 꺼내지 못하게 하세요.”

나 역시 유학을 왔다가 결혼을 통해 영주권을 받았다. 물론 내가 결혼을 서둘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LA에 계신 시댁에 결혼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식구들과 식사하러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데, 작은시아버지가 나를 잠깐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아가씨, 사회 경험이 많아 보이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겠어. 영주권 때문에 우리 조카랑 결혼하려는 거 아닌가?”

권투 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자마자 카운터펀치를 맞고 쓰러지듯,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부모 떠나 멀리 낯선 땅에 혼자 와 있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싶었다. 과연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다 집어치우고 끝내고 싶었지만, 겨우 감정을 억누르고 그날 밤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전형적인 이북 여자들의 투박하고 거친 매너에 늘 혀를 차시던, 과묵한 함경도 출신의 시아버지가 계셨다. 그 시아버지께서 내게 건네신 한마디가 없었다면, 아무리 영주권이 급한들 내가 그 결혼을 감당했을까. “나는 서울 아가씨가 상냥해서 좋아요. 변변치 못한 우리 아들이랑 결혼해 준다니 고마워요.”

어떻게 같은 시할머니 뱃속에서 나온 두 형제가 그리도 다를 수 있을까. 작은시아버지는 그 거칠고 모진 말투 때문에 본인의 며느리도 아들과 이혼하게 만들었다. 딸의 결혼식에는 미국인과의 결혼이 못마땅하다며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LA에 갈 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유도 없이 또 다른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시아버지가 옆에서 “왜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기도 했고, 나 역시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하곤 했다.

작은시아버지는 6·25 전쟁 전, 북어 한 짐을 지고 걸어서 38선을 넘어 서울로 오신 분이다. 밑바닥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70년대 초에 이민을 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라스베이거스에 투자한 것이 잘못되어 속을 썩이시더니, 불면증에 시달리다 한밤중 차고(Garage)에 앉은 채 쓸쓸히 돌아가셨다. 지금은 네바다주의 뜨거운 모래밭에 묻히셨지만, 살아생전 어찌 그리 수많은 모진 소리를 가슴에 품고 사셨는지 모를 일이다.

“영주권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좀 해주면 안 되나요? 결혼은 서로 없는 부분을 채워주며 잘 살아가는 거잖아요. 혹시라도 그분이 영주권만 받고 도망친다 해도 몇 년은 같이 살 텐데, 불쌍한 사람 구제해 줬다고 치면 안 되나요? 저 좀 보세요,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그동안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한을 시어머니 앞에서 토해냈다. 내 말을 듣던 시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맞장구를 치셨다. “아이고, 그러게 말이다. 작은아버지가 저번 너희 왔을 때도 ‘화가는 죽어야 이름이 난다’며 쓸데없는 소리를 하더니만……”

물론 영주권이 없으면 생활이 불편하고 늘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오직 영주권만을 목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겠는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서로 이성적인 호감도 있으면서 영주권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상대에게 없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 감사하며 너그럽게 베푼다면, 지나가던 복도 편히 누울 자리를 보고 찾아올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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