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4, 2013

피카소도 오나시스도 아니지만

풀타임 화가인 우리 부부도 한때는 여느 한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치열하게 장사를 했던 적이 있다.

1985년 초, 당장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했다. 가진 돈도, 뚜렷한 기술도 없는 처지를 탓하며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상점가를 맥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 상가 입구에 먼지가 가득 쌓인 채 비어 있는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창문에는 임대(Rent) 사인이 붙어 있었다. 배고픔이 만들어낸 무모한 용기였을까. 나는 덜컥 집주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달 치 보증금(Down payment)과 한 달 치 월세로 계약을 맺어주십시오.” 우리 형편으로는 감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심정으로 집주인에게 간곡히 사정했다. 우리 부부를 위아래로 한참 쳐다보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집주인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그럼 먼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보증금을 채우고, 일단은 한 달 치 월세만 내고 시작해 봐요.”

하지만 당장 첫 달 집세를 내야 하는 것은 물론, 가게를 꾸미고 물건까지 채워 넣으려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또 어디서 그런 뻔뻔한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다. 예전에 선배 소개로 서너 번 눈인사만 겨우 나눴던, 같은 동네에서 델리(Deli)를 운영하시던 분을 덥석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분은 아무런 담보도 없이 선뜻 몇천 불을 꿔주셨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는 은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헨리는 70년대형 낡은 자동차 트렁크 문을 열고 봄 재킷들을 내게 넘겨주었다. 도매상에서 덤핑으로 나온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해 소매상에 대주는 중간 상인이었던 그를, 나는 1년 전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할 때 알게 되었다. 내가 옷가게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물건을 먼저 대줄 테니 팔아서 갚으라며 가장 먼저 내게 달려와 주었다.

가게 내부 수리부터 간판 제작까지 모두 남편이 손수 도맡았다. 미처 간판을 달기도 전이었는데,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대부분 폴란드계 이민자들이었다)이 신기한 듯 기웃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남편이 여전히 망치질하며 가게를 수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내가 손님을 맞이하며 장사를 했다. 물건은 떼어 오기가 무섭게 무서운 속도로 팔려나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든 시점이 마침 부활절(Easter)과 어머니날(Mother's Day)로 이어지는 미국 대목과 맞물렸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부활절을 전후해 봄옷으로 화사하게 갈아입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시절이었다. 폴란드인들이 옷을 차려입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민족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으로 건너온 폴란드인들의 취향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던 헨리 덕분이었다. 그가 가져다준 봄 재킷과 겨울 코트는 동네 아낙네치고 우리 가게 옷을 한두 벌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셀 수도 없이 팔려나갔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텅 비어 있던 가게는 물건으로 가득 찼다. 빌린 돈을 모두 청산하고, 집주인에게 두 달 치 보증금을 마저 치르고도 손에 쥐는 현금이 꽤 쏠쏠했다. 다음 날 끼니를 걱정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머릿속은 온통 돈 벌 궁리와 또 다른 가게를 늘려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시아버님이 알래스카에서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뉴욕으로 오셨다. 그리고 장사가 잘되어 싱글벙글하는 내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던지셨다. “네 남편을 돈 많은 선박왕 오나시스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화가 피카소로 만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오나시스는 아무나 되고, 피카소는 또 아무나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속으로 궁얼거리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묘하게 머릿속을 뱅뱅 맴돌며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시아버님 당신께서 그 모진 세월 속에서 화가의 꿈을 접고 생활인으로 고단하게 사셨던 분이었다. 그렇기에 아들만큼은 온전한 화가의 길을 걷기를 바라셨는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돈맛을 들이며 장삿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마뜩잖으셨던 게다. 남편 역시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잘되니 신이 났지만, 장사와 그림을 병행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쉽지만 우리는 박수 칠 때 가게를 처분하기로 결단했다.

지금 남편은 억만장자 오나시스도 아니고, 세기의 거장 피카소도 아니다. 하지만 온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묵묵히 캔버스를 채워가는 그 시간, 그 삶 자체가 이미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자그마한 기쁨이 아니겠는가!

1 comment:

  1. ㅎ ㅎ 그래도 지금은 피카소에 가까이 계시니 잘하신 결정이셨네요.

    그리 힘든 시간들을 이제는 추억할 수 있으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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