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30, 2025

행복이 뭐 별거냐

올해 가을은 유난히도 길었다. 나뭇잎들은 계절을 잊은 듯 여전히 초록빛을 띤 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센트럴 파크를 한가롭게 걷던 중, 갑자기 아랫배에서 신호가 왔다. 소위 '폭풍 설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티제이맥스(T.J. Maxx) 매장으로 무작정 들어가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남자 소변기 같은 것이 슬쩍 스친 것도 같았지만, 워낙 급해 눈에 뵈는 게 없다 보니 그대로 칸막이 안으로 돌진했다.

겨우 일을 치르고 나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아뿔싸, 휴지통에 휴지가 없다. 내 주머니를 뒤져봐도 야속하게 먼지만 잡힐 뿐이었다. '와, 어떡하지? 이럴 땐 대체 어쩌란 말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는데, 바로 옆 칸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칸막이 밑 틈새로 시선을 던지니 묵직한 남자 구두가 보였다. 아이고, 내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 앉아 휴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급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뻔뻔해진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슬그머니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저기, 죄송한데요. 여기 휴지가 없어서요. 휴지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후, 칸막이 밑으로 한 움큼의 휴지가 조용히 넘어왔다. 내 난처한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이어서 또 한 뭉치의 휴지가 툭 건네졌다. 구원의 손길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제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 건가요?” 이윽고 옆 칸에서 굵직하고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맞아요. 여자 화장실은 입구 오른쪽에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셨나 봅니다.” “너무 급해서 미처 보지 못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 남자가 칸막이 밖으로 나오기 전, 나는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뒷정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여자 화장실로 피신하듯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나는 용변이 급할 때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혹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태운 기차 안의 비극적인 풍경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 빽빽한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대변이 급했을 땐 대체 어떻게 해결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아득해진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기차에 쌓인 오물을 버리려고 문을 열자, 문짝만 한 얼음판이 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장면이 나온다. 삽으로 그 얼음을 때려 부수고 볏짚 더미 뒤엉킨 오물을 문밖으로 쓸어내던 혹독한 장면. 그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지금 깨끗한 변기에 앉아 안전하게 볼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 크나큰 축복으로 다가왔다.

고차원적인 삶이 아니면 어떤가. 그저 잘 자고, 잘 먹고, 시원하게 잘 싸기만 해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나에게 이 소박하고도 거대한 행복을 안겨준, 옆 칸의 점잖은 신사분께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살아가며 감사의 빈도수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행복한 시간도 그만큼 정비례하여 늘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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