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26, 2025

그해 봄날은 따듯했네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출근한다. 평생 '직장'이라는 곳에 다녀본 적 없는 내가, 12년 전 맨해튼으로 이사 오면서도 차마 처분하지 못하고 남겨둔 스튜디오에 판화 작업을 하러 가는 길이다. 정오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온몸이 늘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질질 끌리는 발걸음은 한없이 피곤하지만 아직도 출퇴근할 기운이 남아 있는 내 자신이 문득 대견하게 느껴진다.

문득 결혼 후 맞이했던 첫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당시 시아버지가 보내주신 비행기 표를 들고 LA에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돈조차 없었던 나는 대학 시절 만든 판화를 액자에 넣어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아버님, 선물로 제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판화가 아니냐?” “네, 뉴욕에 와서 판화 공부를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만든 작품이에요.” 훑어보시던 아버님이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판화기가 있어야겠구나."

그리고 1990년, 시아버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와 함께 거금의 수표가 도착했다. “판화기를 사라. 공부한 것을 썩여서야 하겠니.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일에서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꼭 판화기를 사서 작품에 전념해라. 난 네 시어머니가 걱정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니, 나이 들어 소일거리 없이 자식만 바라보고 살까 봐 참 걱정이구나.”

그해 따스한 봄날, 판화 프레스기를 사기 위해 필라델피아 근교의 시골길을 달리던 여정은 내 생애 가장 기쁜 순간으로 남아 있다. 눈물이 핑 도는 시야 너머로 가슴 깊이 외쳤었다. '아버님 감사해요. 정말 열심히 작업할게요.'

사실 내게 그린포인트는 그리 달가운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에 살며 작업실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화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참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린포인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암울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 오랫동안 외면해 왔었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발걸음을 할 뿐이었다. 특히 우리의 첫 작업실이었던, 거대하고 시커먼 팔각형 벽돌 굴뚝이 버티고 선 옛 염색공장 부근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추위에 떨던 쓰라린 기억이 살갗에 남아 있는 탓이었다.

한동안 판화에서 손을 놓고 지낸 탓에 처음 며칠은 손에 익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신나게 찍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젊은 시절의 그 활기찬 나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연판을 닦고 문지르는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삶의 활력이 세차게 솟구친다. 판에 그림을 그리고 묵직한 판화기를 돌릴 때면, 여전히 팔심 좋은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와 휠을 함께 거들어 준다. 가끔 들여다보는 아이들도 멋지게 나온 작업물을 보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얘들아, 이거 할아버지가 사주신 판화기야.” “알아요, 엄마. 할아버지는 정말 멋지고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님이 물려주신 거대한 유산 위로, 우리 가족의 오늘이 다시 단단하게 찍혀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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