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3, 2008

묘지를 산택하는 여자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애비뉴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BQE 길가에 칼바리(Calvary) 공원묘지가 있다. 맨해튼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듯이 이 공원 안에도 묘비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가끔 공원에 들어가서 묘비명을 읽으며 한적한 고요함 속에 머물다 나온다.

고인의 이름을 보며 조상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얼마나 살다 죽었는지를 추측하며 묘지를 산책한다. 1700년에 태어난 묘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납골당 창문의 유리 먼지를 닦고 안을 들여다봤다. 관을 넣을 수 있는 서랍들이 포개져 쌓여있다.

누군가 죽어서 관이 들어 있는 서랍에는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연도가 적혀져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으면 들어갈 빈 서랍도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이 어둡고 써늘한 납골당 서랍 안으로는 들어가기 싫다.

공원묘지를 걷다 보면 어느 중세기의 한 마을에 들어선 느낌이다. 중앙에 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교회를 중심으로 커다란 납골당들이 그리고 작은 납골당들이 줄지어있다. 조각을 새긴 높은 비석이 그 뒤를 따라 내려오다 작은 비석들로 이어진다. BQE 근처 가까이 갈수록 아주 작은 비석들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는 높은 묘지 자리는 비싸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 한국 이름이 쓰인 묘비는 보지 못했다.  

돈 많은 사람은 죽어서도 마치 저택처럼 육중한 돌로 지어진 납골당에 뽐내듯이 묻혀있다. 돈 없이 죽은 사람은 고속도로 길가에 버려지듯이 묻혀있다. 죽은 영혼들이 햇살이 밝은 대낮에는 조용히 숨어있다가 밤이 깊어지면 우리가 사는 모습처럼 나와서 움직일 것만 같다. 돈이 많아 죽은 영혼들은 화려한 파티를 하며 즐길 것이고, 돈 없이 죽은 혼들은 돈 많은 혼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것 같은 커뮤니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칼바리 공원묘지에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잠들어있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에 사는 이탈리아 친구가 어린 딸을 잃었다. 딸을 먼 곳에 묻는 게 싫어 집 가까이에 있는 이 묘지에 묻었다. 묘지 자리가 너무 비싸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집 가까이에 묘지를 두고 산책하듯 자주 드나든다. 무슨 날에만 조상 묘지를 찾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다르다. 죽은 영혼과의 관계가 우리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죽음은 끝이요 그리고 영원한 휴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칼바리 묘지에서 보는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연장이요, 투쟁인듯하다. 

Wednesday, November 12, 2008

A woman taking a walk in a cemetery

If you walk east along Greenpoint Avenue in Brooklyn, you’ll find Calvary Cemetery next to the BQE highway. Just like the buildings lined up in Manhattan, the gravestones in this cemetery stand in neat rows. Sometimes I go in and read the inscriptions, spending quiet moments in peaceful silence.

As I walk through the cemetery, I read names and try to guess where the people were from, when they were born, when they died, and how long they lived. It’s not hard to find gravestones from the 1700s. I once wiped the dusty glass of a mausoleum window and looked inside. There were drawer-like shelves stacked on top of each other, each holding a coffin. On the drawers that hold someone’s remains, names and birth/death years are written. Some drawers are still empty, waiting for a future family member.

They say you don’t feel anything after death, but I still wouldn’t want to end up in one of those cold, dark drawers.

Walking through Calvary feels like stepping into a medieval village. There’s a large church in the center, built to comfort the dead, and around it stand big mausoleums, with smaller ones lined up nearby. Tall, carved headstones come next, and then smaller and smaller gravestones follow.
Closer to the BQE, the graves become more plain and humble. It makes me wonder—are the higher spots with views of the Manhattan skyline more expensive?

So far, I haven’t seen any gravestones with Korean names.

Rich people lie in grand mausoleums built with heavy stone, like luxury mansions. Those who died poor seem to be buried along the noisy highway, almost as if they’ve been cast aside. It feels like, during the day, the souls stay quietly hidden, but once night falls, they rise and begin to move, just like we do. The wealthy spirits might throw fancy parties, while the poor ones follow them around, serving them—just like in real life. That’s the kind of “community” I imagine.

Many Italian Catholics are buried in Calvary Cemetery. A few years ago, an Italian friend in my neighborhood lost her young daughter. She didn’t want to bury her far away, so she chose this cemetery, close to home. She complained about how expensive the plots were, but still visits often—like taking a walk. Unlike Koreans, who mostly visit ancestors only on special days, it seems Italians feel closer to their dead. To them, the relationship doesn’t feel distant, even after death.

I used to think death was the end—eternal rest. But what I see in Calvary Cemetery feels different.
Here, death looks more like a continuation of life, and even… a kind of struggle.

Thursday, October 30, 2008

남편이 철든 이유


쇼크요법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남편을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놀랄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드는 것 같다.

오래전 브루클린의 한 옷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였다. 젊은 
남자가 여자들이 신는 살 색 스타킹을 머리 위에 돌돌 말아 얹어 놓고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별 미친 녀석이 다 있네!’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서 속으로 웃었다.
“돈 내놔!”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던 그 남자가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누런 봉투에 감아진 총을 나에게 들이댔다. 영화에서만 봤던 스타킹을 쓴 일그러진 얼굴을 실제로 보니 너무 이상하고 우스웠다. 어떻게 일그러졌나!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는 내 얼굴 가까이 봉투를 들이밀며 
"돈을 안 주면 죽일 거다!”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과연 봉투 안에 총이 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야 웃기지 마, 놀고 있네.” 
봉투를 확 낚아채려고 나는 손을 뻗었다. 오히려 강도가 놀라 나를 밀치고 금전등록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돈을 집히는 만큼 갖고 달아났다. 달아난 도둑을 쫓아서 가게 밖으로 뛰어나가려는데 점원들과 쇼핑하던 손님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의 한 점원은 벌벌 떨며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왜 그랬냐, 미쳤느냐.” 
사람들이 난리였다. 과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 마디로 무지가 사람 잡을 뻔 했다.
“돈을 달라면 무조건 주지 왜 그랬냐? 죽지 않은 게 다행이야”
옷 가게 주인이 놀라 달려와 핀잔했다. 일주일 전에도 옆집 피자 가게에 강도가 들어와 돈을 안 주다 총에 맞아 죽었단다.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 무서운 사건이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와 누웠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배는 점점 심하게 아팠고 하혈을 했다. 임신 3개월 된 아이가 떨어진 것이다. 아픈 배를 쥐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엔 병원에 실려 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벌어먹여 살릴 테니 집에 있어”
다음날 남편은 스튜디오 문밖의 자물통을 채우고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가게 키를 갖고 왔는데 출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인아저씨가 와서 창밖으로 열쇠를 던져 주는 것으로 나의 직장 생활은 끝났다.

결혼 초 그 사건 이후, 나는 전업주부가 됐다. 남편이 그때 꽤 놀랐나 보다. 화가 남편이 그림 그린다고 아내 돈 벌러 내보냈다가 송장 치울 뻔했다. 그림 그리는 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는 일이고, 입에 풀칠은 하고 나서 하는 일이다. 뭐 그리 대단한 그림이라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하겠는가.

그 후로도 생활이 어려워 직장을 잡아 보려고 신문을 뒤적거릴 때마다 
“집에서 아이들이나 잘 키우라는데.” 
남편은 화를 내곤 했다. 화가를 남편으로 둔 여자가 집에서 푹 쉬고 있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다.

Wednesday, October 29, 2008

The reason why my husband is mature

t rained all day. At the entrance of the G train on Nassau Avenue in Brooklyn, a man stood without an umbrella, looking around. Through thick magnifying glasses, he stared hard at people coming out of the subway, as if searching for someone.
“Hi,” I greeted him.
He didn’t even look at me. From the serious look on his face, it seemed like he was trying to catch someone who had run off with his money.

His name was Frank, and he was a loan shark. We first met him in 1987, when we were trying to get a loan to start our life. The interest rate was 10%—not bad for a private loan. We paid him back steadily for five years, and then he said he’d be willing to lend to us anytime.

Frank owned several buildings and had lots of cash, but he was single. He was very hard to reach. He used a phone that could only receive calls, not make them—he wanted to save money. If we wanted to meet him, we had to go to his house early in the morning.

Frank always wore the same vest and suit. You could call it a “suit,” but it looked like he’d worn it for decades. It was worn out and smelled terrible. On rainy days, the smell was so strong it was hard to breathe. His greasy old suit was so stiff that even the rain wouldn’t soak through—it just rolled off.

His chest looked puffed up, almost like he was wearing a bulletproof vest. But it was just full of small notebooks stuffed in his vest and suit pockets. These notebooks, tied tightly with rubber bands, were where he kept records of loans. It took time just to untie the bands. While he searched for our records, we had to stand there in the stench and wait. But if you wanted a loan, that was the price you paid.

Once he opened the notebook, his serious face would turn into a happy smile. He seemed to enjoy watching his money grow through interest. He loved counting money, but he didn’t seem to enjoy spending it at all.

In his younger days, Frank had worked at a local movie theater, collecting tickets. He saved every penny, then started lending money privately. That’s how he built his wealth. He never got married because he was afraid of losing his hard-earned money. He lived alone his whole life, with no close friends or family.

Then one day, our checks stopped going through. About six months later, we got a letter from his lawyer. We were told to make future checks out to “The Estate of Frank Birosik.” Frank had passed away.

His fortune went to a distant niece in Philadelphia, someone he barely knew. How could he close his eyes and leave all that money behind, without ever even buying himself one new suit?

Thursday, October 16, 2008

약속과 거짓말

아주 오래전 나는 한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아이의 울부짓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옆에 한국 할머니가 사셨다. 복도에서 만나면 몇 마디 인사를 나눌 정도다. 어느 날 인사를 나누다가 잠시 서울에 다녀온다고 말씀드렸더니 며칠 후에 연락이 왔다. 

"아이 아버지가 미국에 자리 잡으러 먼저 왔어요. 아이 엄마는 남편이 이제나저제나 불러주기를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자 남편 찾아서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 왔다는군. 남편이 사는 주소로 찾아가 여러 날 아파트 문가에서 기다리며 밤샘을 했지만,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네.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고생하다 재혼할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아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니 어째겠어. 남편 부모에게 아이를 보내야지. 아이를 서울 갈때 데려가 줬으면 하는데."

아이의 엄마는 슬픈 모습으로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를 안고 공항에 나왔다. 
"김포공항에 아이를 데리러 할아버지가 나올거예요. 잘 부탁해요."  
아이를 내게 안겨주며 울면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자던 아이가 깨어 울며 엄마를 찾았다. 아이 이름을 부르며 달랬다. 비행기 안이 어두워 엄마 얼굴을 확인 못 한 아이는 다시 잠이 들었다. 알래스카에서 잠시 내렸다 타야 했다. 불이 켜지자 아이는 엄마를 찾으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너 자꾸 울면 엄마에게 데려다주지 않는다.” 
반 협박 조로 달랬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울음을 그쳤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감지 한 아이는 자기 이름을 아는 아줌마를 잊어버리면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내 눈치를 보며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와 나는 꽤 친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아팠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친할아버지에게 가지 않으려고 아이는 울며불며 나에게 매달렸다. 갓난아기 때 헤어진 할아버지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잠에서 깨어나니 엄마는 없고, 자기 이름을 아는 아줌마가 ‘엄마에게 데려다준다’고 해서 말 잘 듣고 따라온 아이였다. 믿고 따라온 아줌마는 거짓말을 하며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자기를 맡기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내 치맛자락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붙들린 아이는 돌아서 가는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엄마, 엄마” 
부르며 내게 오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부모의 이혼이 아이의 몸을 반으로 자르는 것과 같은 큰 상처를 준다고 한다. 난 그 아이에게 주는 상처에 공범자가 되었다. 그런 일을 하겠다고 자초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아이가 어려서 기억 못 하기를 바라지만, 만약 기억한다면, 나의 거짓말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가장 커다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지금쯤 서른 살이 됐을 아이가 어디선가 부디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