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7층 바느질 공장으로 올라가는 낡고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국 아줌마들의 요란한 수다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2층을 지날 때 가장 우렁찼던 소리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물속에 잠기듯 서서히 멀어져 갔고, 그러면 나는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가 다시금 위에서부터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2층 우리 집을 지날 때면 마치 폭풍이 스쳐 지나가듯 요란해졌는데, 그때쯤이면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소리에 합류하듯 저녁 찬거리를 사러 차이나타운으로 나서곤 했습니다.
이 낡은 건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결혼 선서만 마친 채 따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룸메이트와, 나는 나의 룸메이트와 각각 퀸스에서 살고 있었지요. 소호가 지금처럼 번화하기 전, 뉴욕시 문화국(DCLA)에서는 예술가들이 맨해튼 소호(SoHo)와 노호(NoHo) 지역 내의 빈 창고를 주거 겸 작업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예술가 인증(Artist Certification)'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남편도 1982년에 이 인증을 받아 룸메이트와 함께 거대한 창고 건물 안에서 작업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변한 직업이 없던 가난한 화가 부부에게는 함께 살 집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결혼 후에도 한동안은 결혼 전처럼 따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 때, 남편의 룸메이트가 그랜드 스트리트에서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작업실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룸메이트가, 다른 한쪽은 우리 부부가 쓰기로 했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아담한 침실이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우리 침실 구석에는 이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드럼과 북 같은 타악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밤마다 악기 더미 곁에 누워 있노라면, 마치 떠돌이 곡마단 단원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피로에 지쳐 천막 구석에 몸을 뉘어 쉬는 듯한 기분에 젖어 들곤 했습니다. ‘이 방황은 언제쯤 끝이 날까? 끝나지 않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 덜컥 화가와 결혼한 것이 후회되기도 하던 밤이었습니다.
한 달 집세 천 달러 중 우리 부부가 육백 달러를, 룸메이트가 사백 달러를 냈습니다. 우리 침실 아래층이 바로 부엌이었는데, 벽 한구퉁이에 달력을 걸어놓고 장을 볼 때마다 쓴 액수를 적어 두었다가 달이 끝나면 정확히 셋으로 나누어 계산했습니다. 집세와 생활비를 정산할 때마다 우리 셋은 ‘이 생활을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서글픈 미소를 서로 교환하곤 했습니다. 난방 시설이 전혀 없던 그 넓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추위가 닥칠 때면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던 영화 속 닥터 지바고가 순간순간 떠올랐습니다. ‘내가 주인공 라라만큼 미인이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매서운 추위를 견뎠습니다. 게다가 건물은 노후해서 쥐와 벌레가 들끓었습니다. 나는 밤마다 온몸 구석구석을 긁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남편은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침대에 흰 종이를 깔고 천장을 툭툭 두드려 가며 떨어지는 벌레들을 잡아주곤 했습니다.
우리 먹고살기도 팍팍한 형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다가다 들르는 친구들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모릅니다. 친구들은 스튜디오 한가운데 놓인, 때에 찌든 커다란 회색 소파에 번갈아 누워 자고 놀며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 서울에서 와서 살 곳을 찾을 때까지 몇 달씩 머무는 지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스튜디오를 그랜드 스트리트에 있다고 해서 ‘광장교회’라 불렀습니다. 내 남편은 ‘이 목사’, 우리 룸메이트는 ‘황 장로’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친구들은 아예 우리 스튜디오로 퇴근했다가 이튿날 그곳에서 출근하곤 했습니다. 그나마 이류 대학을 나와 기가 죽어 있던 우리 처지와 달리, 서울대를 나온 황 장로는 동문회 송년 파티에 갔다가 먹다 남은 양념 불고기를 커다란 플라스틱 버킷 가득 싸 오기도 했습니다. 식탁 위에 그 불고기와 김치 한 병만 올리면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이 행복했습니다. 더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수많은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 그 시절에는 왜 그리 힘들지 않았을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만 같습니다.
건물 주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콩나물을 키워 파는 노인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내러 지하실에 갈 때면 사방이 너무 어두워 큰 소리로 주인을 불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저 멀리서 장화 신은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오며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내가 "어르신, 너무 어둡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면, 그는 "밝으면 콩나물이 너무 빨리 자라서 곤란해" 하고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집세를 받고 나면 인심 쓰듯 콩나물을 서너 움큼 넉넉하게 싸주곤 했습니다. 집세를 내고 나면 주머니에 땡전 한 푼 남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우리는 그가 준 콩나물로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밥을 지어 먹으며 콩나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내 붓을 놓지 않고 버텼습니다.
이제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오니, 그때 그 소파에 기대어 함께 웃었던 그 친구들이 몹시도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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